“왜 청군(淸軍)은 돌연 태도를 바꾸어 먼저 종전을 위한 협상을 서둘렀을까?” 병자호란(1636년 12월∼1637년 1월)이 남한산성에서 ‘최후의 결전’ 없이, 예상보다 조기에 협상으로 마무리된 것은 당시 조선에 퍼진 ‘천연두’ 때문이란 가설이 역사학계에서 제기됐다. ‘우발성의 조선사회론’이라는 주제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이 주최한 국제학술회의(2016/06/16-17)에서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병자호란과 천연두’라는 발표논문을 통해 그동안 의문이 남아있던 돌연한 조기 종전은 청나라 기록인 ‘청실록(淸實錄)’과 ‘승정원일기’ 등 여러 기록을 살폈을 때 청 왕조가 극히 두려워한 천연두의 발생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삼전도의 굴욕’을 겪긴 했으나 종전과 청군의 철수 과정에서도 큰 피해 없이 전쟁이 마무리된 게 천연두 ‘덕분’이라는 것이다.

청 제국은 역사상 어떤 왕조보다 천연두에 민감했다. 청 제국을 건설한 만주인은 중원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왕과 왕족 등을 포함해 수많은 백성이 천연두로 죽었고, 중국의 선행 연구들은 유전적으로 이들이 천연두에 취약했음을 시사한다. 만주인들은 일찍이 천연두 환자를 발견해 보고하는 관직(사두관·査痘官)을 두었고, 천연두를 앓아 면역을 획득한 숙신(熟身)과 그렇지 못한 생신(生身)을 구별해 기용할 정도였다. 왕은 천연두가 유행하는 동계와 춘계에 ‘피두’(避痘·천연두를 피해 떠남)를 했다. 병자호란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온 ‘생신’ 홍타이지(태종·太宗)는 특히 피두를 위해 중요한 장례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은 압도적 우세인 데다 본국에서 우려했던 명군(明軍)의 배후 위협도 없었다. 조선 측의 협상을 연거푸 거절하는 등 서두르지 않던 홍타이지가 갑자기 정월 17일 쫓기듯 협상을 제안한다. 바로 전날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은 ‘홍타이지 부근에서 천연두 환자가 생겼다는 사실’ …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 조선왕궁에 들어가 조선의 왕을 만나는 꿈을 꿀 만큼 ‘서울 입성’에 집착했으나, 조기 종전을 한 후 서울에 입성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선양(瀋陽)으로 돌아갔고, 그 도중에 어느 지방의 성에도 입성한 흔적이 없다. 선양에 돌아가서도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 일행과의 만남을 두 달 가까이 미루었는데 모두 천연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