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은 문치주의 사회였다. 학맥을 통해 정치세력을 형성했고, 그 사상과 이념에 따라 정책과 노선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정책과 노선을 통해 백성들의 삶 속에서 검증을 받고, 그 검증을 통해 권력을 차지하느냐 못하느냐가 결정되던 시대였다.” “그동안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봉건’이라는 굴레를 씌웠다. 신분적 억압, 부자유, 남녀차별 등 계몽주의 서사가 덧칠한 ‘과거’, ‘전통’의 다른 이름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인식을 벗어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오항녕, 2010)

2. 위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조선시대를 계몽주의의 서사로써 덧칠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는 신분적 억압, 부자유, 남녀차별이라는 것들로써 특징지어졌다. 달리 생각해보면, 조선시대에 신분적 억압, 부자유, 남녀차별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사태를 왜곡한, 계몽주의적 서사의 덧칠인 것이다. 그렇다면 강명관의 <<열녀의 탄생>>에 등장하는, 시부모의 병을 낫게 하려고 허벅지 살을 베어내 끓여먹이고 국가의 표창을 받은 열녀의 행실과 그것을 장려한 것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성리학적 이상이 넘쳐 흐르는 고귀한 사회의 충실한 성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기의 육신을 희생함으로써 잃어버린 나를 되찾아가는 행위’라고 해야 하는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억압기제”아닐까. 억압기제는 근대 계몽주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체제’는 필연적으로 억압기제를 파생시킨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체제는 “이념형 조직”을 운용한다. 어쨌든 저자는 조선시대의 실상을 왜곡하면서 계몽주의 서사가 잘못 덧씌운 것을 입증하기 앞서 강명관의 <<열녀의 탄생>>이 조선시대사에 대한 왜곡임을 입증해야 할 듯하다. “이 책에서 독자가 읽게 되는 저자의 착상과 연구노트, 특히 현대적 논의와 관련된 부분은 ‘혹세무민’의 우려가 있는 ‘迂闊한 소리’이므로 철저히 간과해야 할 것이다.”

3. “<곁에 두는 세계사>를 보니 1670년과 1671년 조선에서는 ‘경신 대기근’이 발생했군요.”(gaudium)

4.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조선왕조가 대기근을 타개하기 위해 매관매직을 하여 일반 백성들을 구제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17세기 행성충동설’인데요. 지난번 석학 강좌 때 그리 얘기하더군요. 이태진 교수 주장은, 흔히 조선의 멸망 원인으로 지목되는 매관매직이나 부정부패가, 실제로는 행성충돌로 인한 피해에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일제 식민사학이 이를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cogitaum)

5. “왕만 공명첩을 팔아먹은게 아니라 세도 가문도 팔아먹었는데(이들이 더 팔아먹었겠지만) 이게 과연 ‘훌륭한 수단’인지 의심해보진 않는 모양이군.”(gaudium) 

6. “18세기 영조와 정조의 시대가 조선의 문예부흥기요, 문화적 성세(盛世)라고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 그렇긴 하지만 이 시기 사대부 문화의 현상적 융성은 어디까지나 사대부 ‘문화 틀’ 속에서의 발전이요 변용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발전이란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청대(明淸代) 중국 문화나 예술의 아류적 수용에 가까운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언진의 작품 <호동거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호들갑에서 벗어나 “18세기 조선 사대부 문화의 허상과 취약점, 그 국한성을 읽어 내는 하나의 중요한 시좌(視座)를 확보하게 된다.” 체제내화된 사대부들의 텍스트만 읽을 때에는 감지할 수 없는 반역성 - 근대성이 아니다 - 을 발견함으로써 시대에 대한 균형잡힌 통찰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7. “조선시대 말(末)을 한번 떠올려 보자. 1800년에 정조가 죽었다. 정조를 놓고 애상 띤 어조로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이 있다. …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책 <<목민심서>>에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를 실으면서 그 사연까지 적어두었다. 그 시는 1803년에 강진에서 지은 것이다. 한 백성의 집에서 아이를 낳은 지 3일 만에 그 아이가 군적에 올랐는데, 그 집에서 군포를 내지 못하자 관에서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 갔다. 이 일을 당한 아이의 아버지는 칼로 자신의 남근을 잘라 버리면서 ‘이 물건 때문에 고생’이라 했으며, 그 아내가 그 남근을 들고 관가에 가서 호소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 정조 때는 태평성대였는데 죽은 지 고작 3년 만에 나라가 콩가루 된 걸로 봐야 하는가. 아니다. 그전부터 나라는 콩가루였다. 조선시대 각 신분계층 구성 인구 비율 통계가 그걸 말해준다. 1600년대 말 대구 지역을 예로 보자. 양반이 9.2퍼센트, 양민이 53.7퍼센트, 노비가 37.1퍼센트였다. 이 비율이 약 100년쯤 지나 1780년대쯤 오면 양반 37.5퍼센트, 양민 57.5퍼센트, 노비 5퍼센트가 되고, 1850년대 철종 때쯤 오면 양반 70.3퍼센트, 양민 28.2퍼센트, 노비 1.5퍼센트가 된다. 조선시대 말의 양반이 인구의 70퍼센트가 넘는 것이다. 영정조라는 현명하신 왕들도 이 도도한 양반 증가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를 쓰고 양반이 되려 했는가.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는 병역의무도 납세의무도 없었다. 인구의 30퍼센트가 70퍼센트를 먹여 살리는 나라가 정상인가. 고종이 도장 찍으며 자기 소유의 나라를 넘기며 제 잇속을 챙겼을 때 과연 30퍼센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면 21세기 한국은 다른가. 흔히 하는 말로 20대 80의 사회에서 80이 20의 특권층을 먹여 살리고 있으니 그나마 낫다고 할 것인가. 그런데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은 왜 이 대다수의 80퍼센트는 20퍼센트의 못된 버릇을 배우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억울하면 이를 갈아 부치며 세상을 갈아엎을 결심을 하지 않고 출세할 생각만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왜 그런가.”

8. “1829년에 순조 즉위 30주년 경하연을 베푸는데 흉년으로 함경, 경상, 충청, 전라도에 기민이 259만 5천명이나 발생한건 뭘로 설명하나? 참고로 184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그때 조선 인구가 670만 1,629명. 그러니 259만여명이 기민이었다면 나라가 절단나는 수준이었다고 할밖에.”(gaudium)

9. 정조 사후 양반 수의 폭증과 함께 ‘하드리버그 = 조선’이 연상된다. “물적 토대”가 허술한 “통치 이념”은 정당화 명분일 뿐, 견고한 윤리를 존속시키지 못한다.

A. “조선을 보면 참으로 싸가지 있는 나라같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왜 그런 싸가지 있는 나라의 왕족과 정승들이 나라를 팔아먹었을까 하는 것이다.”(gaudium)

B. “그들이 ‘싸가지’를 강조하여 얻고자 한 것을 나라를 팔아먹음으로써 얻을 수 있었기에 그리했으리라 생각합니다.”(cogitaum)

C. “통치이념을 팽개친 순간 [차마 표출하지 못했던] 돈독이 화악 올랐다고 봐야겠군.”(gaudium)

* ‘조선’과 ‘동독’은 각각 이념과 체제의 한계를 보여주는 실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