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는 교육자이자 무도인이다. 그는 레비나스 철학의 권위자이면서 합기도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에서 무도적인 의미에서의 ‘약함’과 철학자가 고찰하는 ‘무지’ 간의 공통적인 구조를 포착해낸다. 둘 다 변화하는 것에 대한 강한 억제를 보인다는 점에서 같다. 그에게 무지는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지식으로 머리가 빼곡하게 채워져 새로운 지식을 더는 받아들일 여지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럼 무엇을 묻든 이미 알고 있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자신이 그간 사용해온 정보처리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려는 태도가 새로운 지식에 대해 무지한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다. 지적 틀을 바꾸어야 입력 가능한 정보 - 차원이 다른 - 가 더는 그런 종류의 사람에게는 입력될 수 없으니, 그의 아집이 스스로 무지를 자처하게 한 것이다. 즉 무지란 변하지 않으려는 태도, 배움을 저지하고 억제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칼 포퍼가 ‘진정한 무지는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그것을 얻기를 거절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것은 그 무지에 안주하려는 의지를 해체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무안하게 하고 당황스럽게 하고 어쩔 줄 모르게 하여 자신의 차원이 얼마나 낮은지 알게 하는 일이 교육이다. 무도인들게 ‘약함’ 역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으려는 성향을 말한다. 몇 가지 이전에 없던 잔기술을 익히거나 심폐기능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변했다고 착각하는 정서가 약함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하드 디스크 용량을 증가시키는 것일뿐 근본적으로 OS를 버전업 한 것은 아니다. 생명은 시간을 통해 변화를 가져온다. 무지와 약함은 그 변화를 두려워하여 현재를 고수하려는 의지다. 그것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영역에서 괴물을 낳는다. 자신만 죽을 뿐 아니라 많은 생명 현상들을 잠재우고 억압하고 숨구멍을 틀어막아 질식시킨다. 나희덕 시인의 시 <부패의 힘>을 만나면서 그 역설이 가진 메세지의 힘에 나는 움찔했다.”(박대영)
부패의 힘 _ 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