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내가 기독교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인간이 죽는 몸과 죽지 않는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상이었다. 나는 몸이 영혼의 집 같은 것이고, 일단 죽으면 영혼은 천국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혹은 왜 그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실제도 신조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가 되었을 때는 비물질적이고 영원하며, 잠시 인간의 육체에 죽을 때까지만 머물다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영혼을 믿을 이유를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면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스콜라 학파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영혼 불멸설을 믿었다. 중세에는 ‘몸’과 ‘영혼’을 구분했다. 그리고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무생물과 다른 이유는 ‘영혼’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을 근거로 정당화되었는데, 신약성경이 일반적으로 ‘육체와 영혼’에 대해 말하고, 간혹 ‘몸, 혼, 영’을 말하기 때문이다. 아퀴나스 같은 중세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몸’을 인간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부분을 일컫는 것이라고 이해했고, ‘영혼’은 인간의 육체 안에 단지 기거할 뿐인 비물질적이고 영원한 영적인 실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성경의 진술들을 정말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는가? 20세기의 많은 학자가 비물질적인 영혼의 개념은 성경적이기보다 세속 그리스적 사상이라고 지적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간에 대한 관점은 하나의 실체, 즉 여러 가지 양상이 있으나 분리는 할 수 없는 ‘정신-육체의 통일체’다. 구약성경은 인간을 “육화된 영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으로 보았다(H. Wheeler Robinson). ‘영혼’은 다양한 성경의 용어들을 번역하는 데 사용되는 앵글로-색슨 단어인데, 그렇게 번역이 되는 성경의 용어들은 대체로 ‘생명의 기초’ 혹은 ‘살아 있는 존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성경은 인간의 어떤 부분을 일컫는 데는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인간 존재의 양상으로 이해한다. 신약성경의 경우도 비슷하다. 바울이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롬 8:4)이라고 한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서로 다른 부분인 육체와 영혼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차원에만 머무는 것과 하나님과 연결되는 삶을 사는 것의 차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혼’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존재의 양상으로 생각하거나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능력이 우리에게 참 정체성을 부여해 주고, 그 정체성을 유지해 준다.”
_ 그릇된 체계로 조야한 사유를 얼마나 그윽히 하는가. 신념에 신조를 맞추는 우활한 소리를 얼마나 충실히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