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은 본래 산맥 이름으로, 고전 교육을 받은 서양인들에게는 중부유럽에서 콘스탄티노플로 갈 때 거쳐야 하는 고대의 헤무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이 무렵에는 이미 몇몇 지리학자가 피레네산맥이 이베리아 반도의 산마루에서 북남 경계를 이루어 주듯, 발칸산맥도 유럽 남동부 반도를 가로지르는 것으로 착각해, 발칸을 그 지역 전체를 통칭하는 말로 확대 사용하기 시작했다.”(16)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 이 전쟁으로 유럽에서 오스만 지배는 끝났다 ─ 이 일어날 무렵 발칸이라는 용어는 이제 통용어가 되기에 이르렀다. … 1917년 동방문제를 다룬 역사책에는 이제 “이전 세기의 지리학자들이 ‘유럽의 터키’라 부른 지역이, 그 동안에 일어난 정치적 변화로 새로운 이름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 지역도 ‘발칸 반도’나 혹은 간단히 ‘발칸’이라 불리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실려있다.”(19)

“발칸의 도시들은 으레 동방적 실체는 뒤에 숨기고 겉모습만 유럽풍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가령 철로는 유럽식이지만 마차로는 유럽식이 아니라는 것, 기술은 유럽식이지만 예배의식은 유럽식이 아니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회구조는 거의 언제나 외양은 현대적이고 내용은 전통적인 것으로 분리돼 있다.”(29)

“전체적으로 볼 때 발칸 산맥 동쪽의 연평균 강수량은 산맥 너머 서쪽의 연평균 강수량보다 10인치에서 20인치 정도가 낮고, 그 때문에 가장 비옥하다는 평원도 연례행사처럼 매년 가뭄을 겪는다.”(44)

“발칸의 마을들은 수세기 동안 주요한 정치, 행정, 재정, 군사적 단위로 농촌 주민들의 집단적 삶을 구성해왔다. 발칸인들에게 ‘조국’은 곧 ‘마을’이었으며, 마을의 대표는 국가의 고위 인사나 타인들 앞에서 주민을 대신해 발언하는 대변자였다. 하지만 이 같은 고립된 집단성은 19세기 무렵부터 주민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81)

“오스만 유럽에서는 인구의 태반 ─ 80퍼센트는 될 것이다 ─ 이 기독교도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 이슬람이 침투한 농촌 지역에서조차 투르크어는 힘을 쓰지 못했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모국어인 슬라브어를 썼고, 무슬림인 잔니나의 알리 파샤도 투르크어가 아닌 알바니아와 그리스어를 썼다. 크레타의 무슬림 농민들은 그리스어를 쓰면서, 그들 대부분의 조상인 기독교인들만큼이나 크레타의 서사시 에로토크리토스를 즐겨 읽었다. 에디르네 일대 투르크족 중심지를 벗어난 외곽지역에서는 투르크어가 도심에서만 쓰는 행정 언어로 역할이 축소되었다. 보스나 세라예(사라예보), 스코페, 소피아 같은 도시들은 거의가 이슬람 일색이었고, 기독교 해역에 속하는 오스만 지배하에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섬들도 독일어를 쓰는 도시들만큼이나, 슬라브어 사용 지역인 동유럽에서 제 역할을 다했다.”(101)

“어떤 종교를 믿느냐를 질문에 마케도니아의 농부들은 성호를 그으며 “우리는 성모마리아를 믿는 무슬림입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116)

“개종하면 으레 배교, 실존적 고뇌, 개인, 국가적 배신을 떠올리기 마련인 우리와 달리, 오스만제국의 많은 사람은 ‘진정한 신앙’을 위해 ‘이교도 종교’의 ‘무지한 세계’를 떠나는 것을 크게 중요시하거나 갑작스러운 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으로는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이동하는 것이 한 종교를 포기하고 다른 종교에 빠져드는 행위라기보다는, 구종교에 새로운 종교를 하나 덧붙이는 행위로 보였다.”(123)

“발칸 지역의 국가 건설은 19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그것은 장기간에 걸친 지루한 실험이어서 발칸의 여러 ‘힘없는 민족들’은 이 기간에도 여전히 오스만제국의 신민으로 남아있거나 ─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세르비아인, 루마니아인, 그 밖의 다른 민족들처럼 ─ 합스부르크제국의 신민으로 남아있었다.”(164)

“1878년이 발칸에 대한 열강의 지배가 최고조에 오른 시기였다면 이후 30년간은 발칸에 대한 열강의 지배가 와해된 기간이었다.”(167)

“러시아는 1905년 일본에 패한 뒤에야 남동부유럽에 다시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의 긴장관계는 더욱 높아졌다.”(168)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에서는 합스부르크제국의 통치에 반대하는 비밀 결사 조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결사 조직들 중 “단결 아니면 죽음”이라는 비밀조직이 1914년 사라예보 암살 사건과 연루돼 있었다.”(174)

“1921년에서 1922년까지 그리스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투르크는 아타튀르크로 더 유명한 무스타파 케말 주도하에 터키 공화국을 탄생시킨다. … 1923년 그리스와 터키의 강제 주민교환 ─ 이 조치로 무슬림들은 그리스를 떠나 터키로 향했고, 아타톨리아의 정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로 ‘돌아갔다’ ─ 으로 양국의 인종 구성은 더욱 동질화되었다.”(183)

“1923년까지는 동방문제가 일단락되었다. 10여 년에 걸친 전쟁으로, 수세기 동안 발칸과 동부유럽 대부분을 지배한 제국들은 마침내 와해되었다. 하지만 제국들이 붕괴해도 서방 진보주의자들이 예상한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계승 국가들이 민족성 원칙을 내세우며 이웃국가들의 영토를 서로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185)

“종교의 시대가 끝나고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오고 있었으며 민족주의는 이 둘 다에 걸쳐 있었다.”(186)

* 164~174쪽 사이의 해소되지 않은 의문 _ 극단적 분파주의 부상 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