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발터 벤야민을 처음 접했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다. 그러나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 이 구절은 내가 문학 전공자로부터 연극 전공자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그림, 사진, 음악, 영화 등 대부분의 예술이 복제 가능하고, 애초부터 무한복제를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의 발전 속에서 연극은 여전히 ‘지금, 여기서’ 일회적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연극은 어제의 공연과 오늘의 공연이 다르고 낮공연과 밤공연도 다르다. 영화배우는 카메라를 향해 연기하지만 연극배우는 관객을 향해 연기한다. 영화배우의 연기는 카메라 앞에서 여러 번 연기된 후 다시 기계적으로 편집되지만 연극배우의 연기는 관객들의 반응과 순간순간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매번 일회적인 것이 된다.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연극은 ‘전시 가치’보다는 ‘제의 가치’, 즉 예배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혹자들은 대량 복제의 시대에 연극이 사양길로 접어든 예술이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술이 ‘단 하나의 유일무이한’ 아우라를 상실해가는 시대에 연극이 지니고 있는 원시적, 제의적, 수공예적 가치는 오히려 연극을 영속시키는 생명력임을 확신한다. _ 김미도 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