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 les cimes du désespoir d’Emil Cioran
“시오랑이 죽은 뒤 그의 단칸 아파트를 돌아보던 평론가 시몬 부에는 그의 책상 서랍에서 고인이 57년부터 72년까지 일상의 짤막한 단상들을 기록해 놓은 수첩 서른 네 권을 발견했다. 그 수첩의 내용물은 염세와 회의의 극단을 가장 빛나는 프랑스어로 구축한 시오랑 글쓰기의 우수리들이었다. 부에는 그것을 <수첩 1957∼1972>라는 제목으로 편집해 11월 초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내놓았다. 생전의 시오랑은 갈리마르 출판사의 전속 문인이었다. <존재의 유혹> <역사와 유토피아> <시간의 추락> <찬미 연습> 등 10여 권에 이르는 그의 모든 책이 갈리마르에서 나왔다.”(1997. 12. 11.)
“선생님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골칫거리의 시작이었고 그래서 늘 절망의 꼭대기에서 살았다고 털어놓으셨습니다. 20대의 선생님이 염세주의에 허우적대는 걸 보신 선생님의 어머니가 ‘네가 이렇게 불행해할 줄 알았다면 너를 낙태했을 텐데’라고 말씀하셨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 삶의 무의미와 비참을 견뎌냈고, 고종명하셨습니다. 향년 84는 장수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도 그리 박한 세월은 아닙니다.” “프랑스 소설가 생-존 페르스는 선생님을 ‘폴 발레리의 죽음 이래 우리 언어에 명예를 준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라고 불렀습니다. … 선생님은 어느 날 노르망디 디에프의 한 여관에서 말라르메의 시를 루마니아어로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선생님은 ‘아무도 읽어줄 사람 없는’ 선생님의 모국어에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읽어줄 사람이 많은’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 결심을 지키셨습니다. …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쓸 때, 저는 제 생각을 그 언어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제게 허락한 생각들만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제가 그 언어들을 너무 늦게 다루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허황한 꿈을 접고 제 모국어인 한국어로만 글을 씁니다. 선생님의 과장된 표현을 빌리면 ‘아무도 읽어줄 사람 없는’ 제 모국어로 말입니다.” “한국에도 한국어로만 글을 쓰기 때문에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할 젊은 재능들이 수두룩합니다. 저는 가능하면 제 손녀 세대가, 늦어도 제 증손녀 세대가, 한국어와 함께 영어를 자유롭게 쓰기 바랍니다.”(2015. 10.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