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1958)은 아렌트 철학의 절반을 담고 있다. 아렌트는 집필 당시에 이 책을 ‘활동적 삶’이라는 제목으로 불렀다. 간단히 말하면 이 책은 행위에 관한 철학을 담고 있다. 그리고 아렌트는 죽기 얼마 전인 1973년과 1974년의 기포드 강좌였던 『정신의 삶』(1978)에서 비로소, ‘활동적 삶’과 대비되는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인 ‘관조적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

원래 수줍고 내성적이었으며 비정치적이기까지 했던 아렌트는 나치즘과 유태인 탄압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대면하면서 정치적인 ‘활동적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아렌트는 1933년에는 파리로 망명하고, 다시 1941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조건』은 아렌트의 이러한 삶의 이력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행위의 인간학적 위상을 재평가하면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행위’라는 관점에서 재구조화하고 있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활동적 삶의 세 가지 근본 양태를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분류한다.

* 당시 법정에 선 아이히만에게서 사람들이 보려 했던 것은 야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가장이요, 자상한 남편이요, 충실한 직장인일 뿐이었다. 월급을 받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충격적인 아이히만의 모습에 아렌트는 충격을 받았다. 이 충격이 아렌트로 하여금 〈정신의 삶1 사유〉를 쓰게 했다. 아이히만의 문제점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도무지 생각을 하지 않는 ‘무사유’라고 아렌트는 지적한다. 무사유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 속에 깃들 수 있는 악이다. 이를 아렌트는 ‘평범한 악’이라고 말한다.

* 아렌트는 “미완성작으로 남은 ‘정신의 삶’(사유, 의지, 판단)을 집필하던 중, 1975년 12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몰려들었지만 지적인 동료라 부를 만한 사람은 열렬하게 사랑했던 하이데거 정도였다.” “아렌트는 화젯거리를 쉴새없이 다루는 것을 좋아했으며, 견실함의 모자람이 정도를 넘어섰다.”(월터 카우프만, 인문학의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