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에 의해 개별적으로 발전되어온 여러 요소들을 종합하는 작업을 필요로 했다. 영국에서 이 작업을 했던 학자는 마셜이었다. 그러나 마셜은 1890년 <경제학 원리>에서 부분균형 분석을 택하고, 발라스적인 일반균형은 책의 후미에 수학적 부론으로 간략하게 다루는데 그쳤다. 게다가 오스트리아학파의 자본 이론은 거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 결과 마셜은 지대나 임금을 한계생산성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었으나, 이자율의 결정에 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 반면, 스웨덴에서 빅셀은 <국민경제학 강의>에서 멩거와 뵘바베르크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학파, 제번스와 마셜로 대표되는 영국의 한계주의, 발라스와 파레토로 대표되는 로잔학파의 일반균형이론 등에서 나온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마셜과는 달리, 명시적으로) 종합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초기 한계주의를 완결했다. … 빅셀은 대부분의 다른 경제학자들처럼 상아탑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53세가 되어서야 대학의 정식 교수직에 오른 빅셀은 경제학을 공부하기 전에 먼저 당시의 사회 변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사회 개혁을 몸소 실천했다. 그의 경제학은 매우 추상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 배후에는 사회 개혁 의지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