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미학은 왜 윤리인가, 그 물음의 답은 다음 문장에 있다. 고대의 별이 필연의 계시라면, 근대의 별은 우연의 결단이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기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天空)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그 까닭은 불이 모든 빛의 영혼이며, 또 모든 불은 빛 속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영혼의 모든 행위는 의미로 가득 차게 되고, 또 이러한 이원성(二元性) 속에서도 원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영혼의 모든 행위는 하나같이 의미 속에서, 또 의미를 위해서 완결되는 것이다. 영혼의 행위가 이처럼 원환적 성격을 띠는 이유는 행동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은 자기 자신 속에서 편안히 쉬고 있기 때문이고, 또 영혼의 모든 행위는 영혼 그 자체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에서 독립적으로 되면서 자기 자신의 중심점을 발견하고서는, 이로부터 자신의 둘레에 하나의 완결된 원을 그리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본래 “고향을 향한 향수”이자, “어디서나 자기 집에 머물고자 하는 충동”이라고 노발리스는 말한 바 있다.

“메이지 시대 사람이 외국어를 잘한다는 건 속설에 불과하다. 당시 외국어 학교 러시아과에는 교과서가 없었다. 러시아어 서적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국적인 러시아어 교사는 러시아 소설을 낭독했다. 그렇게 하고선 학생들에게 그 등장인물의 인간성에 대해 물었다. 하세가와 후타바테이는 이런 교육을 통해 소설은 인간의 고뇌 그 자체를 비추고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적절한 질문을 담는 그릇이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본 근대 문학의 맹아였다. 이를 실천할 때, 즉 『뜬구름』을 쓸 때 후타바테이는 일단 일본어에 따라 뇌리에 있는 이미지를 만들고 이어서 러시아어로 서술하여 다시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원고로 만들었다. 근대 지식인의 소외를 그리기엔 에도 화류계에서 쓰이는 매끄러운 문장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처럼 그는 새로운 글말을 개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