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혁명이 휩쓸고 간 뒤, 프랑스는 무너진 나라를 일으켜 세워야 했다. 교원을 양성하고 산업·과학 분야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키워내는 일이 시급했다. 정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만든 교육기관이 ‘그랑제콜(Grandes Ecoles)’이다. 이에 따라 1794년 에콜 폴리테크니크(Ecole Polytechnique)와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ENS·고등사범학교)가 설립됐다.”

“프랑스 교육부 고등교육과에 따르면 프랑스의 그랑제콜 수는 400여곳. 하지만 프랑스를 움직이는 최고급 인재를 양성한다고 알려진 대표적인 그랑제콜은 20여곳이 채 안된다. 샤르트르, 미셸 푸코, 앙리 베르그송 등이 졸업한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ENS)를 비롯해 이공계로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에콜 성트랄 파리(Ecole Centrale Paris), 상경계로는 HEC, ESSEC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광산 전문인 에콜 데 민, 통신 전문인 텔레콤 드 파리와 국가지도자를 양성하는 국립행정학교(ENA)나 시앙스 포(Science Po·파리정치대학)가 손꼽힌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1805년 나폴레옹으로부터 군사학교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군인을 양성한다기보다는 병기(兵器)를 개발하는 인력을 양성한다는 게 설립목적이었다. 지금도 프랑스 혁명기념일이면 샹젤리제 거리에서 펼쳐지는 가두행진에 이곳 학생들이 맨 앞줄에 서서 행진한다. 입학한 뒤 첫해 동안 학생들은 군대에서 텐트생활 등을 하며 군인으로서 훈련을 받는다.”

프랑스 매체들은 매년 바칼로레아 합격률 등을 바탕으로 전국 고교 순위(Classement des Lycées)를 발표한다. … 루이 르 그랑(Louis Le Grand)과 앙리 4세(Henri IV) 고등학교는 늘 1·2위를 다툰다. 두 학교가 속한 학군(파리 5·6·13·14구)의 부동산은 인기 상한가를 달린다. 이 지역 부동산 소개소 유리창에 붙은 원룸 매물 전단엔 ‘H4와 LLG 인근’이라는 홍보 문구가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원룸을 마련할 형편이 안 되면 창고 또는 차고 등을 빌려 주소지를 만든다. 앙리 4세 고교 전임 교장인 파트리스 코르(66)씨는 르파리지앵 인터뷰에서 “신입생 선발 시즌만 되면 고위급 인사들의 청탁 전화를 받느라 애를 먹는다”고 했다. 두 학교에만 매년 4000여 명이 지원하는데, 내신 성적 등을 감안한 최종 선발 인원은 540명 정도다.

프랑스 대학은 평준화되었지만, ‘대학 위의 대학’이라고 불리는 엘리트 코스 ‘그랑제콜(Grandes Ecoles)’에 입학하려면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한다. 이 코스에 들어가려면 고등학교 졸업 후 2~3년 동안 프레파(Prépa·그랑제콜 입시 준비반) 과정을 거친다. 프레파는 주요 명문고에 설치된 별도의 대학 학부 과정으로, 고교 시절 최상위권 성적을 거둔 학생들 위주로 선발한다. 프레파 과정은 강도 높은 교육 과정으로 채워져 낙오하기 십상이다. 파리 2대학에 다니는 브리스(24)씨도 루이 르 그랑 프레파 과정을 거친 우등생이었지만, 그랑제콜 입학은 실패했다. 그는 “프레파 시절은 악몽 같았다”며 “수험생 시절 낮에 해를 본 기억이 별로 없다”고 했다. 새벽부터 공부를 시작해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프레파 과정 3년 내내 단 하루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 프랑스에 사는 한국인 학부모들은 “한국 대입이 세계에서 제일 가혹하다고 하는데, 그랑제콜만 놓고 본다면 프랑스가 훨씬 더 심할 것”이라고 했다.

국가를 이끌 인재를 선발하는 과정에 걸맞게 그랑제콜 콩쿠르의 난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1월에 원서를 내고 4월 중순에 2, 3주 동안 필기시험을 본다. 합격자는 6월 중순부터 구두시험을 치른다. 힘든 입시에 시달린 학생들은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호연 씨는 필기시험으로 수학 역사 철학 영어 등 모두 7과목을 치렀다. 5개 학교에 복수 지원해 시험을 치르는 데만 3주가 걸렸다. 시험 형식은 비슷하다. 과목별로 한 문제가 출제됐으며 문제별로 A4용지 9쪽 분량의 답안을 작성했다. 시험 문제는 단답식과는 거리가 멀다. 호연 씨가 치른 철학시험 문제는 ‘누구의 잘못인가’라는 질문이 전부였다. 역사시험 문제도 ‘1950년대 이후의 소비와 소비자’라는 질문만 주어졌다. 호영 씨가 본 프랑스어 문제는 ‘행복을 원해야 하느냐’였다. 호연 씨는 “나름대로 문제에 대한 세부 주제를 정한 뒤 그동안 배운 내용을 토대로 창의적인 생각을 전개하는 과정이 까다롭기 그지없다”고 설명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물리시험에선 ‘레이저’라는 화두만 주어졌다. 호영 씨는 광, 파동 등 2년간 배웠던 물리 이론을 총동원해 답안을 작성했다. 구두시험은 더욱 어렵다. 수학시험 문제도 채점관과 대화를 나누며 구두로 풀어야 한다. 채점관은 정답을 맞히느냐가 아니라 정답을 이끌어 내는 과정을 평가한다. 호영 씨가 치른 물리 구두시험은 밑도 끝도 없었다. 채점관은 수도꼭지 아래에 컵을 놓고 꼭지를 틀더니 대뜸 “이야기해 보라”고만 말했다. 호영 씨는 “수도꼭지 안에 있을 때의 물의 상태, 물이 흘러내릴 때의 팽창 등 물리 지식을 총동원해 채점관과 대화를 나눴다”고 설명했다.

* CGPE : 프랑스 주요 명문고에 설치된 2~3년 과정의 특수 교육기관으로 그랑제콜 입시 준비반으로도 불린다. 고등학교 내신 성적 상위 4% 이내 최우수 학생들을 선발한다. 프레파를 이수한 학생에겐 그랑제콜 합격 여부와 상관없이 일반 대학교 학위를 자동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