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 책의 목표는 현상학적 문제들이 어떤 것인지를 짚어보며, 또 현상학적 시선에서는 그렇게도 복잡한 문제들이 사실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라는 점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일들이 바로 현상학적 논의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걸 독자 여러분이 공감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24) 초기 현상학 이론을 주도했던 후설은 철학의 주요한 임무는 우리의 의식과 대상이 만나 이루어지는 경험의 수수께끼를 해명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특히 인간의 의식과 대상 사이의 상관관계, 이를 후설은 지향성 문제라고 불렀는데, 이 지향성 문제를 해명하는 일이야말로 모든 개별 과학의 배후에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주는 철학의 과제로 생각했다. 학문은 인간 의식의 지적 활동이며, 그 활동의 표적이 바로 대상이기 때문이다. 즉, 의식과 대상 사이의 상관관계를 해명하는 일은 모든 탐구 활동의 가장 밑바탕에 놓여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밝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27-28) 20세기 유럽 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두 현상학자 후설과 하이데거가 바로 그런 얄궂은 운명의 주인공들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이기도 했던 후설과 하이데거는 1929년과 1930년을 전후해서 그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된다. 1029년 겨울, 후설은 자신의 또 다른 제자인 인가르덴(Roman Ingarden, 1893~1970)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이데거와 자신의 입장 차이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것이 후설 자신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를 고백했다. “하이데거를 철저히 연구한 후 나는 <존재와 시간>을 내가 발전시킨 현상학의 범위 안에 포함시킬 수 없으며, 불행히도 그의 방법에 있어서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것이 다루는 사태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네.” 1928년에 후설은 자신의 정년퇴임을 맞아 당시 마르부르크 대학에 있던 하이데거를 자기의 후임 교수로 지명함으써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철학과의 정교수로 부임한다. 후설이 하이데거를 자신의 후임으로 지목한 것은 무엇보다 하이데거야말로 자신이 생각한 현상학을 발전시켜줄 인물로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 바로 후설은 인가르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과 하이데거 사이의 철학적 관점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고백하게 된다. 만약 후설이 하이데거를 자신의 후임으로 지목하기 전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1927)을 연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8) 후설이 철학을 연구하며 평생의 과제로 삼았던 것은 철학을 모든 개별 학문의 이론적인 토대가 될 수 있도록 개혁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 과제를 ‘철학은 그 본래의 목적상 가장 엄밀한 학문이어야 한다’는 말로 표현했다. 이때의 엄밀성은 다름 아니라 불분명한 가정이나 미심쩍은 가설은 어떠한 것이든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바꾸어 말하면 철학을 다른 모든 개별 과학들의 토대 학문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리고 후설은 그러한 새로운 철학에 ‘현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31) 하이데거가 보기에 종래의 철학은 존재를 늘 존재자처럼 다루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대상들은 다 존재자, 즉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 존재자들이 ‘있는 것’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존재’, 즉 ‘있음’이 어떤 식으로든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존재’를 ‘존재자를 존재자에게 해 주는 어떤 것’으로 이해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존재’를 ‘어떤 것’으로 보면, 그것은 다시 존재를 존재자처럼 이해하는 셈이 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존재를 존재자로 보는 것은 결국 존재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접근 방식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그는 ‘은폐’라는 이름으로 표현했다. 하이데거는 이제껏 존재의 문제가 잘못 다루어져 왔다는 사실이 철학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본 것이다.

(37) 후설의 학문적 삶은 수학에서 시작된다. 1882년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에서 변수 계산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당시 유명한 수학자였던 베를린 대학의 바이어슈트라스(Karl Weierstrass, 1815~1897) 교수 밑에서 조교 생활을 하던 그가 철학적 문제에 자신을 투신하기로 결심한 것은 빈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브렌타노(Franz Brentano, 1838~1917) 교수의 영향 때문이었다. 사실 후설의 현상학은 브렌타노의 선행 작업을 토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해야 한다. 후설은 브렌타노와 그에게 배우던 동료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지적 분위기는 한마디로 자율적 이성에 대한 신뢰였다. 이러한 지적 분위기는 후설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상을 지배한다.

(38) 후설이 간직한 필생의 꿈은 철학을 모든 학문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줄 수 있는 가장 엄밀한 학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과제가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고지인 것은 분명하다. 예컨대, 후설의 생전에 출간된 작품들, 예를 들어 그를 독일 철학계의 떠오르는 스타로 만들어준 초기 작품인 <논리연구>의 제1권에서부터 그의 학문적 여정에서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말년의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작품에 ‘입문’이라는 단어가 부제로 붙어있다. … 이러한 사정은 그 과제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과 동시에 후설이라는 철학자의 인물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가 끊임없이 새로운 모색을 시도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반성과 비판의 잣대를 견주어 명료하지 않은 부분이 나타나거나, 새로운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스스로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치열한 씨름의 결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설은 생전에 많은 책을 출간하지는 못했다. 자신이 보기에 아직 명료하지 않은 생각들을 책으로 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가 결코 게으른 사람이 아니었다는 증거는 무려 4만여 장에 이르는 그의 유고를 보면 알 수 있다. 더욱이 그것은 모두 속기로 쓴 수고手稿였다. 후설이 죽은 지 7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의 원고는 아직도 출판 중이다. 그가 글을 속기로 썼던 것은 글이 생각의 속도로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40) 현상학이라는 용어는 독일의 철학자 람베르트(Johann Heinrich Lambert, 1728~1777)가 본체의 본질을 연구하는 본체학과 구별해 본체의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을 현상학이라고 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햤다. 이후 여러 학자를 거치면서 현상학은 각기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중에서 후설을 축으로 잡지 <철학 및 현상학적 연구 연보>에 참여한 가이거, 라이나흐, 하이데거 등의 젊은 철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철학 운동을 이른바 현상학 운동이라 한다.

(42) 아렌트는 하이데거가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활동할 때, 그의 강의를 들은 어린 학생이었다. 늘 초록색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초록 미인이라고 불렸던 아렌트와 하이데거는 열렬한 사랑에 빠졌지만 끝내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유부남이었던 하이데거가 아렌트와의 관계를 비밀스럽게 유지햤던 탓이며, 또한 하이데거의 아내였던 앨프리데는 하이데거에게 정말로 헌신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말년에 자신의 원고들을 정리하면서 쓴 헌사에는 평생 자신을 위해 헌신한 아내 앨프리데에게 바치는 글이 있기도 하다. 아렌트가 유부남인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서둘러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면서 둘 사이의 은밀한 관계는 끝났지만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예전의 감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 스캔들은 어느 작가가 하이데거와 아렌트 간의 편지들을 입수해 공개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나치와의 관계 때문에 이미 홍역을 치른 하이데거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그의 도덕성 문제를 다시 한 번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리게 만들었다.

(43) 그의 매력은 무엇보다 철학적 문제를 대하는 새로운 접근과 탁월한 언어적 재능이었다. 이 점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하이데거는 그의 글에서뿐만 아니라 강의에서도 수강자들을 아주 진지하게 사색하게 만드는 비상한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노년의 후설이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독백에 가까운 강의를 한 것에 비해 하이데거의 강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도대체 저 젊은 철학자가 하는 말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깊은 철학적 사색의 맛을 보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이데거의 이런 능력은 사람들에게 곧잘 신비한 인상을 심어주곤 했다. 그의 실제 생활은 그런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젊은 날에는 이른바 ‘실존 양복’을 유행시키기도 하고, 난데없이 스키복 차림으로 강단에 뛰어들어와 수강생들을 철학적 사유의 왕국으로 안내하던 그였지만, 은퇴 후에는 거의 은둔자적 삶을 살았다. 연구와 사색 외에 하이데거가 신경쓰는 일은 없었다. 토트나우베르크의 산 속에서 은둔자적 삶을 살며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다듬고 정련하던 그는 1976년 5월 아내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그가 그토록 해명하고자 했던 이 세계를 떠났다.

(44-45) 하이데거의 존재 이해는 종래의 이해방식을 뒤짚어엎는 것이었다. 그는 역사적으로 전승되어온 존재론의 역사를 오히려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평할 만큼 철저하고 새롭게 사유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본 존재의 의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논리적인 언어 사용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논리적인 언어로는 존재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논리적 언어는 존재의 의미를 고정시킴으로써 자꾸만 ‘어떤 것’, 즉 존재자처럼 오해하게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오히려 시적 언어, 예술적 언어가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를 좀 더 잘 전달해줄 수 있다.

(48) 의식을 탐구하는 것은 곧 의식이 의식을 탐구하는 것이어서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자기 눈으로 자기 눈을 보는 일이나 에스허르(Maurits Escher, 1898~1972)의 그림처럼 두 손이 각각 나머지 손을 그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50) 19세기 후반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 1832~1920)를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이 인간의 마음과 의식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의 기치를 들고 나오면서 많은 수의 사람들, 특히 공허해 보이는 철학적 분석에 실망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탐구의 가능성에 매료되기 시작함으로써 이른바 ‘심리학주의’라고 불리는 유행이 시작된다. 빌헬름 분트는 감각생리학과 영국 연상파의 심리학을 종합해 실험 심리학을 확립했다. 특히 1879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심리학 실험실을 개설해 심리학 강좌를 시작함으로써 실험 심리학의 위상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52) 근대 과학의 혁명적인 발전은 철학을 자꾸만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버렸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세계에 대해 가시적인 성과를 끊임없이 내놓아 우리의 삶을 계속해서 변화시킨 반면 철학은 2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논쟁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과학적 지식은 축적되고 성장했지만, 철학적 지식은 관념적이고 공허한 말씨름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른바 실증주의의 바람이 분다. 실증주의의 기본적인 입장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지식’이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실제로(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과학이 학문을 대표하는 선두주자로 나서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심리학주의 역시 그런 실증주의의 바람을 타고 등장한 것이다.

(55) 논리학의 근본 명제 중에 모순율이라는 것이 있다. 모순율은 모든 명제에 대해 그것이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인 경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가령, 누군가 “이 도형은 단일폐곡선이면서 동시에 단일폐곡선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모순율을 사고의 원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심리학주의자가 논리학을 심리학의 한 분과라고 주장하려면, 이 모순율이 언제나 참인 까닭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주의자 중에 한 사람은 이 모순율이 언제나 참인 까닭은 우리의 마음에서 좋고 싫음이 동시에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후설은 되묻는다. 과연 모순율이 더 확실한가 아니면 우리 마음 상태는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 경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더 확실한가?

(62) 철학이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개혁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주장이다. 후설은 이를 두 가지의 문제로 이해했다. 하나는 방법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이와 같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무엇을 탐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67) 후설은 대상이 어떤 왜곡도 없이 있는 그대로 주어진 모습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현상’이라고 부른다. 후설의 철학을 현상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71-72) 후설은 학문의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되도록이면 주관적인 요소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바로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현상의 의미는 늘 다를 수 있음을 자각하는 태도, 즉 하나의 대상이 각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미 현상’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설은 이러한 태도야말로 참된 의미의 객관성이라고 말한다. 어떤 현상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관점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자각하고, 문제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객관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에는 모종의 전제가 숨겨져 있다. 즉, 후설이 말하는 참된 의미의 객관성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해명되어야 할 것이 있다. 하나의 대상 혹은 어떤 현상이 우리에게 서로 다른 의미로 주어질 가능성이 우리의 의식에 있는 한, 그런 의식과 대상이 어떻게 관련을 맺길래 서로 다른 의미가 주어지는지가 해명되어야만 한다.

(72)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후설은 ‘사태 자체’라고 부른다. 이 표현은 ‘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무전제성의 원리’ 외에 현상학의 학문적 경향을 보여주는 아주 상징적인 말이다. 현상학적 탐구는 ‘사태 자체’를 겨냥한다. 그래서 현상학자에게 ‘사태 자체로!’라는 말은 일종의 행동강령과도 같다. 이 강령은 실제로도 대단히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구호가 되었다. 후설이 1900년에 <논리 연구>를 출간하고,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이라는 현상학적 이념을 천명했을 때, 후설의 생각에 동조한 많은 현상학자들, 특히 뮌헨 현상학파라 불렸던 일군의 젊은 학자들은 바로 이 ‘사태 자체로!’라는 생각을 공유했다.

(74) 그 책상이 내게 ‘책상’이라는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당연히 의식 때문이다. 마치 시인 김춘수의 ‘꽃’처럼, 아무것도 아닌 뭔가가 의식과 만나면서 ‘책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남의 방식이 문제다. 정말 서로 별개의 영역에 있는 두 상대방이 만나 대상이 생겨나는 것일까? 후설은 의식과 대상을 분리해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의식과 대상은 언제나 함께 하는 동반자다. 실제로 그 ‘어느 것’을 생각하지도, 느끼지도 않는 의식이 가능할지를 생각해보라. 의식은 언제나 ‘~에 대한 의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는 대상의 방향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상 역시 의식 없이는 대상이 될 수 없다.

(75-76) 의식과 대상이 지향적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말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별로 특별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후설은 왜 이 사실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평가했던 것일까? 후설에 따르면, 의식의 지향적 구조에 대한 통찰은 우리가 이 세계를 경험하는 과정을 해명하는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후설은 과거의 철학자들이 바로 이 지향성의 문제를 끈기 있게 천착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아예 문젯거리로 여기지도 않는 바람에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후설은 의식과 대상 사이의 상관관계를 체계적으로 해명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그저 두루뭉술하게 우리의 의식과 대상이 항상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결국 후설의 현상학은 의식과 대상 사이의 지향적 상관관계를 체계적으로 해명해가는 지적인 탐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탐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결코 단순한 과장이 아니다. 그만큼 인간의 의식은 수수께끼 같은 수많은 비밀을 감추어 놓은 상자다. 실제로 후설은 끊임없이 분석하고, 또 조금이라도 명료하지 않은 부분이 드러나면 계속해서 수정하고 보완해가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것은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개척자의 자세이기도 했다.

(76-78) 후설은 먼저 의식은 작용과 내용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의식 작용에 따라 대상이 주어지는 방식을 천착해 들어간다. 가령, 사물에 대한 지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기억은 어떤 구조적 특성을 갖는지, 지각과 상상은 어떻게 다른지 등 우리의 의식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고찰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우리가 그저 ‘의식’이라고 부르는 존재자가 그동안 자신을 감추어왔던 베일을 벗기 시작한 것이다. (중략) 우리의 의식은 일련의 감각정보를 그저 조각난 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 정보가 어떤 통일적인 관점 아래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재구성한다. 의식의 이러한 능동적인 활동이 바로 우리가 이 세계가 ‘이러저러하다’고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후설은 이러한 의식의 능동적인 활동성이 바로 의식의 지향적 성격을 보여주는 주요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80) 한 시대를 조망하면서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본다고 하자. 그중 어떤 특정한 사건이 중심 사건이 되면, 그 사건을 사이에 두고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여러 다른 사건들이 일종의 배경 기능을 하게 된다. 반면 우리가 배경이 되는 사건 중 하나를 분석하고 그것을 다시 중심 사건으로 자리매김하면 관계는 역전이 된다. 후설은 이러한 사정을 지향성의 지평적 성격이라고 말한다. 지평은 지평선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의 시선이 닿는 한계 지점을 말한다. 우리의 몸이 움직이면, 지평선도 움직이고, 그에 따라 그 지평선 안의 공간 구성도 변화하게 된다. 의식과 대상의 지향적 관계는 이처럼 어느 하나의 관계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며, 중첩적이다. 중심과 배경이라는 위상적 구조가 지향적 관심의 변동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처럼, 한 사물이 서로 다른 대상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경우 또한 이러한 지향적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82-83) 후설은 이렇게 의식과 대상 사이의 지향적 상관관계에 대한 해명을 지향적 분석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분석은 뭔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상태로 풀어놓는 것을 말한다. 즉 지향적 분석은 우리의 의식과 대상이 서로 층을 달리 해가며 중첩적으로 얽혀 있는 지향적 상관관계를 그 각각의 영역에 맞게 자리매김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접근이 애초에 우리가 던졌던 문제, 즉 현상학이 모든 학문들을 이론적으로 정초한다는 이념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아마도 눈치 빠른 독자는 이미 감을 잡았을 것이다. 모든 개별 학문은 그 학문 고유의 지향적 관심들에 의해 지배받는다. 동일한 사태지만 생물학자와 사회학자가 보는 바가 다르고, 또 역사학자가 보는 바가 다르다. 따라서 동일한 사태이기는 하지만 각각의 대상적 의미는 달라진다. 또 각각의 대상적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이거나 오류라고 부를 수도 없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태의 대상적 의미가 다른 것은 그 사태가 우리의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각각의 학문이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현상학이 개별 학문들의 토대를 제공하는 이론적인 근거가 되고자 한다면, 바꾸어 말해 ‘학문들에 관한 학문’이 되고자 한다면 하나의 대상이 어떻게 서로 다른 대상적 의미를 갖게 되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의미가 주어지는 과정도 해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열쇠는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주어진 대상을 하나의 의미 통일체인 대상으로 나타나게 해주는 근거로 우리 의식에 대한 탐구를 전제로 한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의식과 대상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탐구를 전제로 한다. … 거듭 말하지만 의식을 탐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가 되는 의식을 텀구하는 주체가 바로 그 의식이기 때문이다.

(88) 현상학적 방법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기술(記述)이고 다른 하나는 환원(還元)이다. 먼저 기술은 말 그대로 어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내는 것이다. …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내 의식에 뭔가가 떠오른 것을 그냥 그대로 묘사하기만 하면 ‘있는 그대로’가 되는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의식은 늘 어떤 종류의 특별한 관심이나 욕망 등에 오염되어 있다. 따라서 일상적인 의식이 대상을 다루는 방식을 그저 기술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대개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그래서 ‘환원’이라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환원’은 일종의 거름종이처럼 대상을 순수하게 만드는 장치와 같다. 환원이라는 말은 원래의 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인데 이는 우리가 대상을 순수하게 보는 것을 오염시킨 불순물을 걸러내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때문에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현상학적 환원’을 거쳐야 한다.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을 여러 방법을 동원해 설명한다. 그 설명의 핵심은 의식과 대상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89-91) 형상적 환원의 다른 말은 ‘본질 직관’이다. 말 그대로 ‘본질을 직접 본다’는 이야기다. … 어떤 무엇을 ‘의자’라고 생각하거나 그 반대로 ‘의자’라고 볼 수 없게 만드는 어떤 경계선이 있다면, 그 경계선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후설은 그것이 우리가 의자의 본질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후설은 그것이 우리가 의자의 본질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의자의 경우에도 여러 가지 의자를 상상해 보려면 일단 출발점이 되는 의자가 필요하다. … 이와 같이 우리의 시선을 자꾸 변경해가는 태도를 후설은 ‘자유 변경’이라고 불렀다. 변경의 과정 속에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본질이다. (중략) 다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현상학적 환원의 또 다른 판단 축인 판단 중지는 그야말로 주어진 사태를 중립적인 태도에서 보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태도는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그 사태는 이러이러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때의 판단은 대개 주어진 현실에 제약을 받는다. 이를테면, 나의 현재 상황이나 문제가 되는 사태의 이러저러한 조건 따위에 제약되어 있기 마련인 것이다. 판단 중지는 우리의 판단을 이러한 여러 가지 현실적인 제약에서 풀어내는 과정이다. 그렇게 현실적인 제약들로부터 우리의 판단을 풀어내면 무엇이 드러날까? 바로 가능성이다. 예를 들어 두 나라 간의 전쟁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우리가 그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전쟁의 객관적인 상황을 제대로 기술해야 하고, 전쟁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정리해보아야 한다. 이때 조심할 것은 관련 사건들을 조사하는 ‘나’의 상황이다. 사건을 기술하는 ‘나’가 특정 이해관계 속에서 그 사건들을 봄으로써 사건의 해석을 한쪽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반성, 달리 말하면 문제가 되는 사건들이 ‘꼭 그런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이다. 이렇게 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이 바로 판단 중지의 효과다.

(91-92) 현상학적 판단 중지는 ‘자연스러운 믿음’에서 ‘자연스러움’을 빼앗아버린다. 내가 믿는 이런 사태들은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특별한 우선권을 가진 현상이 아니라 그저 의식에 마주해 있는 ‘의미 현상’ 중 하나일 뿐이다. 후설에 따르면, 이와 같은 판단 중지는 의식과 대상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이른바 ‘순수한 현상’을 알게 해주는 발판이 된다.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어디에서 오게 되는지, 이 세계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라는 믿음의 뿌리는 과연 무엇인지, 또 나는 왜 이 세계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경험하게 되는지 등을 제대로 알려면 방법론적으로 이 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구속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다영한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시선을 마련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아니, 유지하는 것은 관두고 그런 관점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할까? … 여기에 후설의 현상학이 부딪히는 일종의 한계가 드러난다. 만약 우리가 ‘순수한’ 관점에 도달하기 어렵다면, 후설 현상학의 목표와 이념 역시 좌초되기 쉽기 떄문이다. 후설은 그와 같은 관점에 ‘선험적’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선험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 세계를 마주해서 겪는 경험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지를 묻는 ‘태도’를 말한다. ‘선험적’이라는 말의 독일어 표현은 transzendental이다. 최근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이 독일어의 번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그래서 선험적이라는 말 대신에 ‘초월적’ 혹은 ‘초월론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93-95) ‘도대체 우리는 이 세계를 어떻게 해서 경험할 수 있는가?’ 이 세계를 경험하려면 생각해봐야 할 조건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들 모두가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한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근거들이다. 분명한 것은 사정이애 어떻든 우리가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선험적 관점이란 그런 경험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지 그 가능 근거들을 밝힌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가능 근거들을 밝혀내려면 내가 경험하고 있는 그 사실에 매여있어서는 곤란하다. 창밖의 나비에 집착하기만 하면, 어떻게 내가 나비를 경함할 수 있는지 물을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인식하는 주관과 인식하는 대상 모두를 볼 수 있는 이른바 제3의 관점을 취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사실’의 문제가 아닌 ‘가능성’의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혹시 ‘신’과 같은 관점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할까? 후설 이후의 현상학자들 중 상당수는 후설의 선험적 관점을 어떤 절대적인 관점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1910년을 전후해서 후설의 현상학에 매료되었던 많은 소장학자 중 일부는 후설이 ‘선험적 현상학’을 주창하자, 그에 반대해서 자기 나름의 현상학적 연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 그런데 아마 후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철학이 감내해야 했던 비판이 다소 억울할 것만 같다. 후설이 인간 이성을 어떤 신적인 상태로 고양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 도달하는 것이 설령 사실상 불가능하더라도, 지레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의 이상으로 삼아 끊임없이 노력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이다. 그러한 태도야말로 학문의 참된 가능성을 보증해주기 때문이다. 후설 스스로가 젊은 시절에 들었던 예처럼 만약 우리가 언젠가 신적인 관점에 도달해서 모든 진리를 알 수 있다면, 그것은 곧 학문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 더는 탐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학문은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계속될 수 있다.

(96-97)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의 전체 역사를 존재론의 역사, 혹은 같은 의미에서 형이상학의 역사로 규정한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해주는 그 무엇에 대한 탐구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세상 만물의 궁극적인 원인은 신(神)이 되겠지만,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해주는 그것은 바로 ‘존재 자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을 ‘기초 존재론’이라고 불렀다. 그 까닭은 종래의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이 완전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본적인 문제 설정부터 다시 해서 완전히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고 생각했다.

(99-100) 하이데거에게 근대적 의미의 이성은 모든 것을 규격화시켜 버림으로써 인간을 비인간적이게 만드는 시스템과 같았다. 이는 특히 그가 전통 형이상학을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먼저 하이데거가 던진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부터 살펴보자. ‘존재’는 그야말로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있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것들은 그야말로 모두 ‘있는 것’들이므로 ‘있음’ 그 자체를 보여주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사고는 대개 이렇게 ‘있는 것’들, 즉 존재자를 향해 있다. 하이데거는 먼저 ‘존재자’와 ‘존재’의 구별에 주목한다. 존재자는 그야말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말한다면 ‘존재’는 그런 ‘존재자’의 근거다. 즉 존재는 존재자가 존재자이게끔 해주는 그 무엇이다. … 하이데거는 전통 형이상학이 ‘존재’를 ‘존재자’처럼 다루었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적 습관과도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공평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이 문장의 주어는 ‘공평’이다. 그런데 ‘공평’은 창 밖에 있는 나무와 같은 존재자일까? 공평만이 아니라 ‘사랑’이니 ‘정의’니 하는 어떤 추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들 모두가 이러한 문제에 걸린다. 물론 그것들은 ‘뭔가’를 가리키는 ‘대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대상이라 하면 우리는 그 대상을 어떤 ‘것’, 즉 존재자로 생각한다. 그래서 “존재는 무엇 무엇이다”라는 문장을 만나도, ‘존재’가 뭔가를 가리키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하이데거는 대상적 사유라고 부른다.

(101)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여타의 존재자들과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구별되는 존재자다. 왜냐하면 오직 인간만이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 하이데거는 인간이 다른 존재자와 달리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다는 점을 ‘존재론적 차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우리가 잊혀진 존재로 다가서게 해주는 실마리 역시 바로 인간이다. 때문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론을 말하면서도 실제 내용은 인간을 분석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하이데거를 실존주의자로 여긴다.

(103) 실존주의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자로서 규정한 채 모든 논의를 시작한 근대 철학에 반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인간 존재의 규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보아야 하는 인간이었다. 실존주의는 이런 구체적인 삶의 현상에서 파악되는 인간에게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닌 ‘실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04) 인간이 특별한 존재자인 까닭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 유일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부른다. 현존재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인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전통적인 의미와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였다.

(106-107) 현존재는 자신에게서 존재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는 존재자다. 인간, 즉 현존재를 제외한 그 어떤 존재자라도 존재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현존재의 특성을 ‘실존’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실존이라는 말은 현존재가 처한 상황과 관련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실존으로서의 현존재는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 세계에 그저 존재하는 것들과 달리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그런 점에서 그는 실존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실존이야말로 가장 고유한 의미의 인간의 모습이라고 간주한다. 이런 의미에서 실존은 인간의 존재방식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현존재는 상황적 존재자다. 즉, 언제나 어떤 상황 속에서든 존재한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는 그에게 현상학적 연구의 길을 열어준 후설과 의견을 달리 한다. 후설은 환원이라는 방법을 통해 우리의 이성이 특정한 관점이나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상정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후설의 이른바 선험적인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 존재할 뿐이다. 그 상황을 벗어날 길은 없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직면한 냉정한 사실이다. 그는 인간 실존의 이러한 상황을 ‘세계-내-존재’라는 말로 표현한다. 하이데거는 특히 이 개념에 이음줄을 붙여넣음으로써 우리의 관심을 환기시킨다. 이음줄의 의미는 이 세계가 단순히 하나의 공간 개념이 아님을 의미한다. 즉, 컵에 물이 있듯이 그저 이 세계 안에 우리 인간, 현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공간적 의미로 새계를 이해하면, 컵의 물을 내버리면 컵과 물이 분리되듯이, 세계와 인간도 분리될 수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와 세계는 그런 식으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현존재는 결코 자신이 속한 세계, 즉 자신의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때때로 아주 힘겨운 상황에 부딪칠 때면,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현실이 우리를 비켜가는 법은 없다. 이것이 상황적 존재인 우리의 삶이 직면한 현실이다. 현존재가 늘 어떤 상황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현존재의 존재 근거인 시간성, 좀더 구체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역사성 탓이다. <존재와 시간>의 한 축인 이 시간성, 혹은 역사성은 인간 실존의 존재 방식의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한 명의 역사적 존재로서 벗어날 길 없는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이 세계 속으로 던져진, 혹은 상황에 내맡겨진 존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계 속에 ‘던져져 있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서 단지 혼자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다. 언제나 그 무엇 혹은 그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는 존재자다. 이 ‘더불어 있음’은 현존재, 즉 실존의 또 다른 존재 방식이다.

(107-108) 우리가 세계 속에서 더불어 있다고 할 때, 그 ‘더불어 있음’의 주체가 누구인지 물어보자.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나와 타인이 함께’일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만약 우리가 그 점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더불어 있음’의 주체는 제3자를 뜻하는 ‘그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는 ‘그들’이라는 익명의 주체를 참된 의미의 실존이 아닌, 일종의 ‘타락한 실존’이라고 본다. 타락한 실존이라는 말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매 순간 자신의 결단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시류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109-110) 친숙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으로부터 유래하는 기분, 하이데거는 ‘불안’을 인간 실존의 가장 근본적인 기분이라고 말한다. … 불안은 ‘있음’을 통해 느껴지는 기분이 아니라 ‘없음’을 통해 느껴지는 기분이다. 앞서 책상 위의 인형의 예를 생각해보자. ‘없음’은 존재가 드러나게 해주는 상황이다. 불안을 통해 인간 실존은 존재를 만난다. 하이데거를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로 분류한 사르트르가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아 쓴 <존재와 무>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제목에서부터 의미심장하다. 하이데거는 불안의 근거를 죽음에서 찾는다. 다만 이때의 불안은 그저 생물학적인 생명 활동의 정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간단히 말해 ‘없음’ 즉, ‘비존재’의 상징이다. 우리는 매 순간 죽음에 직면해 있다. 어느 누구도 내일이 기다린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인간 실존이 겪어내야 하는 사실이다.

(113) 하이데거에게 현상학은 자기 자신을 내보이는 것을 그 자체에서 그대로 보이게 해주는 일이다. 이는 후설이 현상학의 표어로 삼은 ‘사태 자체로’라는 표현을 그대로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후설과 분명하게 선을 그어 차이를 둔다. 그 차이는 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세계 전체를 대상화하는 주관의 선험적 성격에 주목한 반면 하이데거는 후설의 그와 같은 생각에 동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세계-내-존재라는 인간의 실존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후설과는 정반대 쪽에 섰다.

(114) 후설과 하이데거의 차이는 ‘현상’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후설의 ‘현상’ 개념에서 강조되는 것은 무엇보다 ‘대상적 의미’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대상적 의미만이 아니라 은폐된 것을 드러나게 해주는 역할의 의미도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해석학적 현상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경우의 ‘해석’이란 흔히 우리가 다른 나라의 언어를 번역해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오히려 존재의 의미, 혹은 존재와 현존재 사이의 관련성을 밝혀주는 방법의 하나로 해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현상학을 후설처럼 모든 학문에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하나의 ‘철학적 이론’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존재의 의미를 밝히고, 인간 실존이 처해 있는 상황을 파헤쳐 밝혀주는 ‘철학적 방법론’으로 이해한다.

(116)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분기점일 뿐이다. 그가 ‘기초 존재론’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처럼, 그 책은 존재론을 하기 위한 예비적 작품일 뿐이다. 그래서 <존재와 시간>은 질문으로 끝을 맺는다. “존재를 열어 밝히며 이해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현존재적으로 가능한가? 존재를 이해하는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의 구성 틀로 소급해 올라가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가? … 시간 자체가 존재의 지평으로서 드러나는가?”

(117) 하이데거의 관심은 ‘언어’의 문제로 향한다. 언어야말로 존재의 의미를 나르는 수레이기 때문이다. … 독일의 시인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 1770~1843)의 시에 대한 논구를 통해 시적 언어야말로 존재의 빛을 밝혀주는 통로임을 말하고자 했다. 언어는 존재로 하여금 스스로 빛을 발하면서 말을 하도록 하는 중재자다. 때문에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25-126)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은 후설보다 더욱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 철학을 존재 망각의 역사로 규정하고, 극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후설이 근대 학문을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이성을 신뢰했던 것에 반해 하이데거의 초점은 오히려 머리가 아닌 손에 있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머리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보다 손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더 근원적라고 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성을 강조한 전통 철학이 근원적 관계를 역전시켜버린다고 생각했다.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새롭게 해석해 근원적 관계의 의미를 들추어낸다. … 우리 삶에 더 밀접한, 그래서 더 근원적인 관계는 바로 가능성을 사실로 현실화하는 손의 작업에 있다. 이것은 마치 은폐되어 있던 존재의 빛이 열리며 밝혀지는 것과 같다. 이데아 혹은 본질은 어떤 완성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지시물일 뿐, 현실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의 작업을 통해 존재는 세상에 드러난다. 인간 실존의 모습도 그와 같은 실천적 연관 속에서 비로소 제대로 해명된다. 달리 말하자면 은폐되어 있던 존재가 현존재에게서 나타나는 과정,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이행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현존재의 본래 모습도 드러난다. 이러한 실천적 연관을 하이데거는 ‘기술’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본래 기술은 경건한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수공업적인 ‘테크네(techne, 기술)’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인간됨을 가장 원초적인 모습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나 이 기술이 근대 과학의 세례를 받으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근대의 과학 기술은 존재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합리성의 사생아들이 지배하는 근대의 기술은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킬 뿐이다. 인간을 위해 사용하던 기술은 어느 순간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위치로 변화했다. 이는 마치 근대 과학이 객관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을 소외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다.

(134-135) 너는 여전히 전통적인 인식론과 진리론의 입장에서 하이데거를 보고 있는 거야. 그건 마치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초기 양자역학을 비판했던 것과 같아. 당시 양자역학을 하는 사람들은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한 물체의 속도를 알면 그것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고, 그 역도 가능하지만, 미시적인 세계에서는 그렇지가 못하다고 주장했어.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입장에서는 그런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거지. … 양자역학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인슈타인은 완전히 다른 형이상학적 전제를 깔고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비판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지.

(136) 존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야. 눈에 보이는 대상이라면 존재자가 되지. 결국 하이데거가 보기에 과학은 태생적으로 오로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에 우리를 얽어매려고 하거든. 그래서 하이데거는 기술 문명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거야. 중요한 건 그 전에 존재의 의미를 묻는 작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