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4) 경이감에서 기다림으로 움직여 가는 이 내러티브는 자기발명, 경쟁적 생산성, 자기만족을 특징으로 하는 내러티브와 상충된다. 이스라엘의 삶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세상의 길과 상충되는 삶이다. 자기발명 대신 경이감. 치열한 생산 경쟁 대신 해방.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결과를 위한 노동 대신 양식. 전제적 독점이나 자율적 염려 대신 언약의 대화. 자포자기적 복종이나 자율적 자기주장 대신 책임에 대한 보상. 소유 또는 무소유에 대한 절망 대신 기다림. 이 내러티브의 강조점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전승은 세상의 지배적 내러티브가 부적합하며 따라서 결코 진리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지배적 내러티브가 부적합한 이유는, 이 세상의 삶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시는 야웨의 결정적 결의와 능력을 생략하기 때문이다.

(50-51) 내가 사용하는 ‘상상력’이라는 단어는 우리 앞에 놓인 세계에 뿌리박지 않은 현실의 이미지들을 창조하고 말하는 능력을 뜻한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기정사실 밖에서, 당연시되는 상자 밖에서 작동한다. 폴 리쾨르가 살폈듯, 예수의 비유들이야말로 그런 상상의 행위를 보여 주는 고전적 본보기다. 예수의 비유들을 보면 청중이 당연시하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그 분이 생각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리쾨르는 그 비유들을 ‘한계 표현’(limit expressions)이라 부른다. 이는 낯익은 세계 바깥쪽으로 우리를 밀어내는 표현, 야웨와 청중 공동체 사이의 공간에 미지의 영토를 열어 주는 표현을 말한다. 이와 같은 전복적인 해방의 발언은, 계몽주의 합리성에 따라 예언서의 모든 내용에 ‘설명’을 달았던 우리의 비평 작업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예언자적 발언은 토라의 통제 아래서 우리의 이성에 속박되지 않는 감정으로 분출된다. 예언자들은 구체적인 이미지들과 은유들을 사용하되 그것들을 계속 확대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달궈진 화덕’(호 7:4-7),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비둘기’(호 7:11), ‘입을 맞출 송아지’(호 13:2), ‘뒤집지 않은 전병’(호 7:8), ‘들포도를 맺은 포도나무’(사 5:2, 4), ‘터진 웅덩이’(렘 2:13), ‘절박한 창녀’(렘 4:30), ‘통의 한 방울 물’(사 40:15), ‘두려움을 모르는 벌레’(사 41:14) 등이 주는 긴급한 충격을 감지하게 한다.

(51-52) 예언자 특유의 메시지는 확실성이 아닌 가능성과 함께한다. 이 가능성을 통해 이제껏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었던 것을 불러일으키고, 충격을 전하고, 갖고 놀고, 탐구한다. 나는 이 예언자적 발언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의 위대한 투수 밥 깁슨의 빠른 볼과 유사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투구에 대해 해설자들은 말하기를, ‘불쑥 나타나’, ‘움직이다가’, ‘솟아오르고’, ‘놀라게 하고’, ‘압도한다’고 한다. 예언자적 발언은 청중을 깜짝 놀라게 하고 불쾌하게 만든다. 그런 동시에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 실은 우리가 가장 꺼리는 곳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이러한 자극은 세상을 참신한 각도에서 보게 하므로 직선적 산문으로는 실현 불가능했던 도전과 해방을 준다. 그 낯선 발언이 야웨께서 주신 것임을 고려한다면, 즉 야웨 자신의 이미지나 은유, 뉘앙스나 과장법, 모순 어법임을 유념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