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 양성의 긴급함과 중대함을 거듭 방치하면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는 전조가 아닌 상식이 되리라. 양적 급감과 질적 저하. ‘인재 기근’ 시대의 ‘교육 혁명’ 의제는 포퓰리즘과 결별해야 한다. 입시와 서열은 하나요 둘이 아니거니와, 학습부담 완화가 사교육 축소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사교육은 우월한 지위 확보를 위한 투자이기에 입시가 바뀐들 근절되지 않는다. 굳이 명명하자면 ‘대입 깔때기’론은 학습 내용과 방식의 조율을 견인할 뿐, 학습의 재원을 공/사 어느 하나로 제한하지 못한다. 물론, 특정 입시가 사교육과 친화적이란 반론도 있다. 인정하나 수긍하진 않는다. 인정하는 까닭은 공교육의 실태 때문이고, 수긍하지 않는 이유는 학교를 EBS 시청각실로 쇠락시킨 사이비 개혁에 대한 개탄 때문이다.
국력이 비등한 타국과 견줄 때 우리의 대학 진학률은 분명 비범하다. 관건은 대학 이외의 트랙을 모색하는 것이다. 기득권과 갈등이 불가피한, 이것이 험난하기에 얄궂게도 역대 정권은 교육, 좁게는 교육과정, 더 좁게는 입시에 모든 곤란을 쓸어 담아 왔다. 오로지 입시 수월성에 기반을 둔 권력의 배분은 부르디외가 지적한 상징폭력의 재생산이 아닌가.
‘교육노동부‘를 제안한 강준만의 논조에 동의한다.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국민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칸막이도 있다. 일반 대중은 물론 언론도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투명 칸막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투명 칸막이는 ‘교육’과 ‘노동’을 분리시킨 칸막이다. 한국의 교육·입시 정책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그간 나온 수많은 책, 논문, 기사들을 읽으면서 새삼 놀란 건 교육문제가 바깥 세계와 칸막이를 친 채 오직 교육의 영역에서만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교육문제는 교육제도나 입시 방법을 개혁하면 해결될 수 있다는 착각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현재 대통령 후보들의 교육 공약들이 한결같이 그런 착각의 향연에 동참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