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년 8월 11일 로드리고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선출되자 체사레의 운명도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1493년 9월 체사레는 아버지에 의해 발렌시아 대주교와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1494년 나폴리공국의 왕위 임명을 두고 불만을 품은 프랑스 샤를 8세(1470~1498)가 로마를 침공하자 산탄젤로 성에 갇혀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프랑스군이 퇴각하자 프랑스 잔류군을 소탕하였고 나폴리 왕 대관식에 대리 참석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방탕한 사생활로 나폴리에서 매독에 걸려 일생 동안 고생하게 된다.
1498년 추기경직을 포기하였고 로마냐에 왕국을 세워 군주가 되려는 야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왕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정치적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교황 특사로서 프랑스에 갔으며, 국왕 루이 12세와 친숙해져 발렌티누아 공작이 되었고 그가 추천하는 여자와 결혼하였다. 프랑스의 지원으로 중부 이탈리아의 여러 영주들을 정벌하였으며, 1501년까지 로마냐 지방을 정복하여 지배 영역으로 만들었다. 또 나폴리 왕국에도 침입하였고, 밀라노와 피렌체 공화국을 위협하여 항복과 동맹 서약을 받아냈다.
체사레는 이탈리아 중부 지역인 로마냐를 통치하는 군주가 되는 것이 목표였고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 체사레를 통해 자신의 정치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체사레는 부친 알렉산데르 6세가 죽기 전에 목적을 달성해야만 했다. 체사레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처사로 사람들을 떨게하였고, 마키아벨리는 그를 이상적 전제군주로 보고 이탈리아 통일의 가능성을 내다 보았다.
1503년 8월 18일 말라리아에 걸린 알렉산데르 6세가 죽고, 보르자 가의 숙적인 율리우스 2세가 교황으로 즉위하자 체사레는 실각하여 산탄젤로 성에 감금되었다. 에스파냐 카스티야 메디나 델 캄포에 있는 라 모타 요새에 이감되었다가 탈출하여, 나바라 왕국 팜플로나로 갔다. 나바라 왕국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페인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전쟁를 벌일 예정이었으나, 나바라 왕국 내 페르디난드 일파인 루이 드 뷰몽 백작이 배신하여 내전이 일어났다. 1507년 3월 12일 체사레는 드 뷰몽 백작의 라히아쥐 성을 공격하다 포위되어 스물다섯 군데나 자상을 입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