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표현했듯이, 존재자로서의 존재자(being qua being, Seiendes als Seiendes), 존재 자체(being itself, Sein als solches)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한 마디로 존재자(Seiendes)에 관해 그 존재(Sein)가 무엇인지를 구명하려는 학문이다. 그리고 이 존재의 구명은 존재계기, 존재구조, 존재방식, 존재양식, 존재규정 및 존재범주 등의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때의 존재방식, 존재구조 등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자에 속하는 것, 즉 자체적ㆍ즉자적 존재에 귀속하는 것으로서만 문제되는 것이지, 그것을 탐구하는 인식주관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들이 인간의 욕구나 소망에 의해 주조된 것이라면, 그것은 존재 그 자체를 탐구하는 존재론의 탐구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관이나 목적의식 등이 투사된 세계관이 존재론과 동일시될 수 없음은 이 때문이다. 존재론적 탐구의 출발지평은 아무런 선입견이나 선결정이 없는 그저 자연스럽고 객관적인 관점 아래 열려야 한다. 관념론적 철학에서 왕왕 있는 일이지만, 특히 인간의 사고의 형식이나 기능을 주관적인 작위를 통해 존재의 세계에 부여하려 든다면 거기에선 순수한, 있는 그대로의 세계 인식이 어려워질 것이요, 존재론은 그 본래의 과제를 수행치 못하게 될 것이다.”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1882~1950)이 예를 들어 말하듯, ‘현실적인 것’과 ‘현실성’이 다르고 ‘참된 것’과 ‘참됨’이 다르고 ‘아름다운 것’ㆍ‘선한 것’이 ‘아름다움’ㆍ‘선’ 그 자체와 다르듯이, 존재자와 존재는 서로 다르다. 현실적인 것, 참된 것 등은 다수이지만 현실성, 참됨 등은 하나이듯이, 존재자는 무수하지만 존재는 하나로서 동일하다. 존재는 자기동일적인 一者이다. 존재론이 탐구코자 하는 ‘존재 일반’이란 바로 이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왕왕 이 양자의 차이에 무관심하거나 또는 양자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여 존재론적 논의가 혼란에 빠짐을 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자를 도외시하거나 존재를 탐구할 길이 따로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일철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이 제일철학이란 물론 내용상 존재론을 포함하는 것이었고, 그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라는 말로 뜻하고자 한 것은 곧 ‘존재 일반’이었다. 하르트만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명제는 다음의 이유로 합당하다. 즉, ‘존재 일반’이 ‘존재자’들 영역의 배후에 초월해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가 그저 존재자인 한해서 파악되는 것이 바로 존재 일반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가장 근원적으로 확실한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근원적으로 비밀스러운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자명하고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무런 규정성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는 비밀에 찬 암호와 같은 것이다. 어떤 존재자가 ‘있다’거나 무엇‘이다’라고 말할 때 이미 ‘존재’가 거기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가장 궁극적인 자명한 사태를 달리 정의하거나 규정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존재’란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비밀 그 자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렇듯 인간과 세계 전체가 이미 ‘존재’ 속에 들어와 있기에, ‘존재’란 자명한 비밀로서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존재론의 근원성을 다음에 비추어 수긍할 수 있다. 존재론이 세계 전체를 그 자체에 있어 파악하려 할 때 인식주관으로서의 인간이 그 세계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이란 말할 것도 없이 인식주관과 인식대상 사이의 표상관계요, 이는 근본적으로 볼 때 인식하는 존재자와 인식되는 존재자, 즉 존재자 상호 간의 존재 관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식의 구조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인식주관이든 인식대상이든 이들이 존재자 일반으로서 어떤 존재구조ㆍ존재방식 등을 보이고 있는지 구명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인식론은 존재론이라는 보다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탐구 지평에서 그 성립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존재 일반’ 그 자체는 ‘우리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것이다. 즉 우리에게 탐구되어 알려지는 순서에 있어서는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인식 활동이란 당연히 우리에 대해서 ‘먼저 있는 것’으로부터 우리에 대해서 ‘나중에 오는 것’에로 탐구해 나아가게 마련이요, 따라서 인식의 순서라는 관점에서 인식론적으로 보면 가장 근원적인 ‘존재 일반’은 ‘최종’의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존재의 근원성을 감쇄시켜 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인식근거가 존재근거와 꼭 합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거니와, 오히려 이 양자는 서로 대응하여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인식근거에 비추어 볼 때 ‘존재 일반’이 최종의 것이라 함은, 따라서 존재근거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최초의 것이라 함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 일반’은 존재자 그 자체에 있어서는 최초ㆍ제일의 으뜸가는 것이니,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론을 ‘제일철학’이라 불렀고, 그것이 인식에 있어서는 최후에 최종적ㆍ궁극적으로 도달되는 것이니, 이런 의미에서 후에 스콜라 철학자들은 이 제일철학을 또한 최종철학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존재 그 자체’의 탐구라는 존재론의 출발 지평도 근세에 오면서는 변화하게 된다. 신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 이행됨에 따라 철학적 사고도 ‘존재’를 그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조차 ‘인간에 대한’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을 완전히 떠난 존재라면, 즉 어떤 방식으로든지 인간이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존재라면, 그에 관한 논의조차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특수한 양식이 곧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파악되기에 이른 것이다. 근세 이후의 존재개념이 고ㆍ중세의 존재개념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가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방식은 무엇보다도 ‘인식’이므로 ‘존재의 경험에 대한 이론’으로서의 ‘존재론’은 ‘인식론’에 그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칸트의 철학이다.”
“칸트에 있어서 존재론은 오성개념과 원칙이 감각을 촉발하여 수용된 감성적 내용을 질서지우는 한에서, 즉 경험을 통해 보증할 수 있는 대상에 관계하는 한에 있어서, 오성개념과 원칙의 체계를 형성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오성개념과 원칙은 대상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에 내재하는 선천적인 요소들이다. 즉 경험에 앞서서 인식주관에 주어진 일종의 규정작용의 법칙들이다. 따라서 비록 주관에 속하는 이 선천적 법칙이 객관의 경험과 일치함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로써 존재론은 선험철학 속으로 해소되어 인식론으로 변신했다고 할 수 있다. 존재론의 학적 성격이 이렇게 변화됨에 따라 칸트에 있어 형이상학도 새로이 규정된다. 즉 그것은 인식영역을 넘어서는 초감성적 세계를 문제 삼는 탐구로 규정된다. 따라서 자연 형이상학은 사변이성에, 도덕 형이상학은 실천이성에 맡겨지는 영역으로서 오성적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