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1874년 2월 미국에서 돌아온 모리 아리노리가 처음 건의한 것을 계기로 니시무라 시게키 등은 계몽적인 학술결사로서 ‘메이로쿠샤明六社’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메이로쿠샤의 기관지 <메이로쿠잣시明六雑誌> 제1호에서 니시무라는 학술문예에 관한 탁견과 고론을 통해 우매한 민중의 눈을 뜨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메이로쿠샤는 니시무라가 말한 것처럼 당대 일류 지식인들이 참가하여 결집한 메이지 초기의 유일한 학술결사였다. 메이로쿠샤 회원은 당시 니시무라 시게키, 쓰다 마미치, 니시 아마네, 나카무라 마사나오, 가토 히로유키, 미쓰쿠리 슈헤이, 후쿠자와 유키치, 스기 고지, 미쓰쿠리 린쇼, 모리 아리노리 등 총 10명이었다. 그 후 회원 수도 대폭 늘어 창립 1년이 되는 1875년 2월에는 약 30명의 회원이 참여하였다. 기관지 <메이로쿠잣시>는 1875년 11월까지 통과 43호가 간행되었는데, 그동안 회원들이 집필한 백여 편의 논설은 정치, 경제, 법률, 사회, 외교, 종교, 역사, 교육, 자연과학 등 여러 영역에 걸쳐 있었다. 메이로쿠샤는 1875년 11월 <메이로쿠잣시>가 간행정지되면서 해산되었지만, 메이로쿠샤가 지닌 학술단체로서의 성격은 미국의 교육학자로 당시 문부성 학감을 지낸 데이비드 머레이의 건의로 1879년 11월에 성립된 ‘도쿄학사위원회’(제국학사원의 전신)에서 발전적으로 계승하였다.

(36) 1872년 나카무라 마사나오의 <자유지리>가 출판되는데, 이는 ‘자유’라는 번역어를 좋든 싫든 freedom, liberty의 번역어로서 위치를 확고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자유지리>를 출판한 나카무라 마사나오조차도 freedom, liberty의 번역어로 ‘자유’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 다른 저술서에서는 ‘자유’를 사용하지 않고 ‘관홍지(寬弘之)’를 쓰기도 하며, 때로는 원어 그대로 리버티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메리로쿠잣시> 15호(1874)에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자유’를 사용하기도 한다. “religious liberty, 종교에 관한 것. 인민 자신이 믿고 싶은 바에 따를 자유의 권리.”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자유’는 다시 freedom, liberty의 번역어로 등장하게 된다. 어쨌든 <자유지리>의 출판과 그 애독층에 의해 ‘자유’는 freedom과 liberty의 번역어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