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 박(영선) 목사의 신학은 칭의와 성화를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박 목사에 의하면 칭의는 인간의 그 어떤 공로로도 가능하지 않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며, 따라서 여기에 필요한 인간의 책임은 믿음뿐이지만, 성화는 하나님도 어떻게 도와 줄 수 없는 오직 인간 자신이 책임져야 할 대목이라는 것이다. 그가 볼 때 한국교회는 이 두 사태, 즉 칭의와 성화를 확실하게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온갖 문제가 발생했다. “예수를 믿는 신자들 중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과 구원 얻은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이 성화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시는 이 구원에 있어서 칭의란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고 받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사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입니다.”(<의와 영광>, 94쪽)
평신도들은 눈치 채기 힘들겠지만, 칭의는 하나님의 소관이고 성화는 사람의 책임이라는 박 목사의 발언은 매우 위험한 이원론적 발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단정한다. “주님은 우리 대신 싸우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싸울 싸움입니다. 여기가 성화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거리입니다. 여러분은 이 성화를 기도해서 얻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노력하고 연습하고 훈련하셔야 됩니다.”(<의와 영광>, 109쪽) 이런 진술은 그의 설교에 지천으로 널려있는데, 그가 성화를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해야 할 어떤 지경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칭의와 성화에 이르는 길이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칭의는 단지 우리의 믿음에 의한 것이지만, 더 정확하게 그의 신학적 뉘앙스를 살려서 설명한다면 사람이 믿어서 칭의를 얻고 구원받았다기보다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믿게 된 것이지만(<의와 영광>, 72쪽), 성화는 우리의 구체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는 말이다. 철저하게 이원론적이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종교개혁자들과 칼 바르트에게 이르기까지, 어떤 점에서는 조직신학 전반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학자들에 따라서 칭의와 성화를 정확하게 구분하기도 하고, 어느 한쪽에 더 큰 무게를 두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신학사를 거칠게 요약한다면, 마틴 루터는 칭의에 무게를 둔 반면에 칼빈은 성화에, 그리고 바르트는 양쪽에 같은 무게를 두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는 법적인 차원의 칭의와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살아야할 실천적 차원의 성화를 구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박 목사처럼 칭의와 성화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한 정통 신학자는, 내가 아는 한 하나도 없다. 구분은 하지만 이원적으로 분리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잘못 보았다면 누구든지 한수 지도를 바란다. 미리 한 마디 밝힌다면 신학적으로 약간 예민한 이런 주제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아래의 책들을 다시 한번 들추어보았다. 칼 바르트의 <義認과 聖化>, 게르하르트 에벨링의 <신앙의 본질>, 하인리히 오트의 <신학해제>, 한국신학연구소 편 <하나인 믿음>,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3>, 이신건 <조직신학입문>. 박 목사 덕분으로 이번에 기초신학을 다시 공부한 셈이다. 이 문제를 가능한 요약적으로 정리해보자.
칭의와 성화는 기독교 신학 안에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의 현실을 언급하고 있는 신학적 개념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은혜로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이지 박 목사의 주장처럼 우리의 노력으로 성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 때문이지 그것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분리되기 때문은 아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박 목사가 혼란을 일으킨 것 같다. 즉 그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인식론적 구분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함으로써 존재론적 분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한국교회에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인식론과 존재론의 차이를 예민하게 식별하지 못함으로써 벌어지는 신학적 과오는 적지 않다. 구원, 하나님 나라, 삼위일체, 종말론 등등, 거의 모든 주제가 이에 해당된다. 약간 길지만 우리가 깊이 음미할만한 칼 바르트의 신학적 명제를 몇 대목만 간추려보겠다. 바르트는 칭의와 성화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천명한다.
“義認은 지금 여기의 아직 제거되지 않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묵과이다. 聖化는 이런 죄 안에 있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청구이다. / 義認의 은혜는 우리의 삶이고 聖化의 은혜는 죄인으로서 우리의 죽음이다. / 하나님의 죄인-사랑의 역사에 있어서 義認은 영원한 측면이고 聖化는 시간적 측면이다. / 동일한 하나님의 엄숙성으로써 義認의 은혜는 우리를 크고 절대적인 결정 안에 세워놓고 聖化로서의 은혜는 신앙과 복종의 작고 상대적인 결정 안에 세워 놓는다. / 의롭다 인정된 죄인의 신앙과 聖化된 죄인의 복종은 동일한 방식으로 서로 자비에 대한 찬양이고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리의 인정이다.”(<義認과 聖化>, 17-48쪽)
박 목사는 정통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신앙적 오류에 빠졌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비판의 화살은 곧 자기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칭의와 성화를 존재론적으로 분리함으로써 결국 이원론에 빠져들고 말았다. 바로 이 순간에 박 목사는 “내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고 둘러댈지 모르겠다. 기도, 전도, 회개 같은 종교적 현상에 머물러서 실제적인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의 문제점을 강조한 것뿐이라고 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성화가 칭의와 달리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할 어떤 상태인 것처럼 명시적으로 발언한 내용들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 건전한 신학을 심층적으로 공부한 분이라고 한다면 성화의 과정에 신자들의 회개와 믿음이 필요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발언을 결코 취소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발언들은 목회적 필요에 의해서 우연하게 나온 게 아니라, 그의 신학적 확신, 따라서 신학적 오류와 한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