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핀에 긁힌 바탕색 이면의 기이한 물고기”, “바탕색이란 상식에 입힌 옷핀의 상처가 문학이다”, “삶 속에 있는 순간적인 죽음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안의 스승을 찾는 거지요.” 자신을 찾아온 후배 시인 이우성에게 이성복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작가를 스승으로 택한다는 건 배우자를 택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해요. 스승이 없으면 헤매게 돼요.”(<극지의 시> 139~140쪽) 내 안에 스승을 두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는 이성복 시인에게 배웠다. “어른이 없으면 자기가 어른일까요. 아닙니다. 어른이 없는 것, 그것이 어린애지요.”(<끝나지 않는 대화> 226쪽) “좋은 시의 요체는 비(非)시적인 혹은 반(反)시적인 일상사의 급소를 급습해서 매몰된 진실과 아름다움을 구조하는 것이다.”(<고백의 형식들> 167쪽)

그의 비관주의는 평론가 김현이 명명한 대로 ‘따뜻한 비관주의’다. 여기서 따뜻하다는 것은 달콤하다는 뜻이 아니라 나약하지 않다는 뜻이어야 한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약점을 옮기고 다니면 내가 약하다는 증거예요. 그 사람의 비밀을 지켜줘야 그 사람을 싫어할 자격이 있어요.”(<무한화서> 178쪽) … 같은 의문을 시인도 그의 스승 카프카에게 품었었다. 카프카의 문학은 비관적인데 어째서 우리는 위로를 받는가 하고. 시인의 답은 이렇다. 카프카의 문학은 “인생이라는 화마(火魔)를 잡기 위한 맞불”(<극지의 시> 85쪽)이라는 것. 산불이 났을 때 불이 진행되는 방향의 맞은편에 마주 놓는 불이 맞불이거니와, 두 불이 만나 더는 탈 것이 없어 불이 꺼지도록 하는 게 맞불 작전이다. “하나의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임의의 다른 절망을 만들어낸다.”(같은 책 84쪽) 그런 의미에서, 인생이라는 불에 대해 문학은 맞불이라는 것. 그렇구나. 나를 태우는 불을 끄기 위해 나는 타오르는 책들을 뒤적이는 사람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