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을 쓸 때 심시위원이랍시고 응모자들을 훈계하는 일은 가급적 하지 말자고 생각해왔다. 지금부터 하려는 말이 훈계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딘가에 이미 쓴 적이 있지만, 좋은 시는 미학적 가치, 정서적 가치, 인식적 가치를 갖는다(최소한 셋 중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어렵고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철학 분야의 입문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이 기본적인 얘기를 또 꺼낸 것은 이상하게도 이 셋 중에서 어느 하나가 요즘 들어 유독 간과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올해 응모작들에서 절감한 것은 인식적 가치에 대한 무관심과 무능력이다.
예술은 과학이나 철학이 아니므로 인식을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 사람은 “우리 중에 누가 시스티나 천장 벽화를 바울신학에 관한 아주 박식한 한 편의 논문과 바꿀 것인가?”라고 부르짖을지 모른다. 거기에 대해선 <예술철학>의 저자 고든 그레이엄처럼 반박하면 될 것이다. “연극이 직설적인 역사로 대체될 수 없다는 사실이 셰익스피어가 영국사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을 높여줄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나 철학과는 그 인식의 방법과 종류가 다르다는 점은 분명히 자각하되 경쟁 자체를 마다해서는 안 된다.
좋은 서사를 만들어낼 능력은 없지만 재치 있고 세련된 문장을 쓰는 일 정도라면 자신 있다, 라는 생각으로 시를 쓰고 있는 응모자가 적지 않다고 느꼈다. 번듯하게 시의 꼴을 갖춘 작품들에서 그런 내심이 감지될 때면 답답함이 커진다.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않는 문장을 써놓고는 그 문장이 자신이 투여한 것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맥락도 없이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주어와 술어를 어색하게 연결하기만 하면 이근화나 신해욱의 좋은 시와 비슷하게 보일 거라 믿는 것일까. 소설에 비해 시가 독자를 속이기 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사행성 글쓰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인식적 가치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예술가라면 세 가지 확신 정도는 가져야 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인식했다는 확신, 그 인식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 그 인식은 나만이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확신(’인식된 것’의 실체를 논리정연하게 미리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흔히들 얘기하듯이 그런 상태는 시쓰기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다음 다섯 편을 본심에 올렸다. … 그러나 이중에서 당선자가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그런 와중에 다른 심사위원이 본심에 올린 황유원씨의 <세상의 모든 최대화>를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올해는 이 사람이 당선자가 되거나 아니면 당선자가 없겠구나. 다행스럽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당선자를 뽑지 말자고 주장하는 심사위원은 아무도 없었다. 입장과 취향이 다른 심사위원 네 사람을 이 시는 어떻게 설득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에게서는 시의 인식적 가치에 대한 겸허한 존중과 자신이 쓰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 느껴졌다고. 도입부를 읽자마자 나는 자세를 바꿨다(비유가 아니다. 매력적인 도입부는 누워서 시를 읽는 불손한 독자의 등을 실제로 곧추세운다).
화물칸에 일렉 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시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이런 도입부는 분석이고 뭐고 하기 이전에 바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의미와 리듬이 서로 뒤엉켜 달려나갈 조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어서 이 시는 ‘A라는 상황 혹은 기분을 누가 알겠는가? B나 알겠지/알까’로 정리될 구문을 반복하면서, 나쁜 상황은 오히려 그 상황이 극한에까지 이를 때(이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최대화’될 때) 돌파될 수 있다는 ‘인식’을 생산해낸다.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그러다가 아래 문장이 나온다. 자칫 시의 흐름을 깨는 결과를 낳기 쉬운 직설법의 문장들이지만, 앞부분에서 충분한 사전 작업을 해놓았기 때문에 이 부분도 독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너에겐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릴 만한 그 무엇이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이라도 있니? /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을 타고 비옥한 꿈속을 달리다 넘어지는 곳이 늘 절벽 앞이어서 느껴보는 / 아찔함, 그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 / 견뎌본 적 있니!
인식적 가치에 대한 자기 확신이 있었기에 이렇게 쓰일 수 있었겠지만, 이긴 시가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는 점도 희귀한 장점이다. 낭독 혹은 연설에 능한 이들은 어디서 쉬어야 하고 어디서 달려야 할지를 잘 안다. 당연하게도 시인은 행과 연의 길이를 조절하고 배분하면서 비슷한 일을 하고 그것으로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 시인은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존재의) 리듬”에 대해 말했지만, 나는 ‘넘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버린 (시의) 리듬’을 감지할 수 있었다. 황유원씨의 등장이 기쁘다. 세상의 모든 시적인 것들을 ‘최대화’해주시길.
_ 신형철, 문학동네, 2013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