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니체의 『우리 교육 기관의 미래(Über die Zukunft unserer Bildungsanstalten)』(1872)라는 강연 모음집 머리말에 자신의 이야기는 조용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구절이 발견된다. 그는 교육에서 필요한 것은 즉각적이고도 과감한 개혁이라면서 당장 국가가 나서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면 된다고 떠드는 독자는 자신이 문제 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독자의 자격을 한정했다. 그리고 곧이어 교육 문제를 잘 알고 있다며 자신의 특별한 지론을 펼칠 생각부터 하는 사람도 부적절한 독자로 꼽았다. 이 책에 수록된 강연을 한 시기는 니체가 아직 20대의 나이로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로 재직하던 때다.

2.
경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떤 수를 쓰든 입시 지옥을 완전히 없앨 길은 없다. 그런데, 현 체제 하에서 수험생을 둔 학부모들이 입시 경쟁을 없애는 것을 간절히 원하는 것도 아니다. 내 자식이 그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령 모든 대학을 다 일류 대학으로 만들어 누구나 일류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일류 대학은 소수가 있어야 하는데, 성적이 좀 떨어지더라도 (혹은 인성이 좀 나쁘더라도) 내 자식만큼은 거기에 진학하게끔 해주는 제도를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 보통 수험생 부모의 마음이다. 원칙적으로 들어주기 어려운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3.
입시 제도의 개선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무게의 목표를 입시에 실어 놓고 교육 전문가들이 묘책을 내서 그 문제를 일거에 풀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짓이다. … 입시는 교육 과정상의 일이지만 전형적인 사회학적 문제다. 그것도 엄청나게 과부하가 걸려 있는 사회학적 문제인지라 애당초 교육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4.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교육을 어디까지나 수단적 가치를 실현하는 일로 인식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적 행위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교육의 주된 가치는 오직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를 통해 전수되는 지식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결정된다. 예컨대 자동차공학 지식을 전수하는 행위의 가치는 자동차공학 지식, 좀 더 정확하게는 자동차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이 예를 일반화한 아주 간명한 내용이 교육의 가치에 대하여 우리가 이해하는 것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5.
본래 제도는 이념을 실현하는 방안이다. 교육 제도도 물론 교육 이념의 실현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교육 이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제도를 마련하면서 역점을 두는 대목을 보면 지식 전수의 효율성이 그 내용이라 해야겠는데, 그 정도의 내용은 교육 이념이라는 말에 제대로 값하는 무게를 가진 것이 못 된다.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교육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부터 강조를 했다. 교육 이념이라면 바로 그 대목을 어떤 방식으로든 내용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곰에게 재주 넘기를 훈련시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교육에서 가르침의 효율만이 추구해야 할 가치의 전부인 것처럼 이념의 내용을 부실하게 방치해 두는 것은 사실상 교육의 포기를 뜻한다.

6.
실제로 우리의 삶은 부모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뒤 끊임없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꾸며진다. 나의 품성, 나의 세계관, 인생관 그리고 나의 행, 불행 등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모든 것이 그들 타자들과의 만남의 과정에서 확보된다. 특별한 철학 교육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본능적으로 그것을 다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어린애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타인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열심히 배운다. 남의 기분을 헤아려 당기고 늦추고 나서고 물러설 때를 시행착오를 통해 가려내면서 거기에 적응한다. 그것은 학과 공부처럼 집에 가서 나 혼자 예습 복습하는 일도 아니었다. 또 학과 공부처럼 훗날의 삶을 위해 쟁여 놓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현장에서 남과 함께 배우고 동시에 행하는 것이었다. 즉 공부가 곧 삶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가 곧 자기 폐쇄다. 그런 상태는 학과 공부에서 낮은 성적을 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심각한 것이다.

7.
부모가 자식의 정체성을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결정지어 준다면, 선생은 학생을 그가 위치해 있는 세계의 문화 속으로 안내해 그의 정체성에 문화적 배경의 깊이가 스며들게 해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생은 학생을 역사 속의 존재로 성장하게 해 주는 것이다.

8.
우리나라의 반지성주의는 무엇보다도 인문 지성을 극도로 위축시키는 데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가령 문학은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산업 역군으로 애쓰느라 거칠어진 마음을 보듬어 쉬게 해 주고 더욱 열심히 일하도록 활력을 충전해 주는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인간 삶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해될 리 없다. 인간 삶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좀 더 의미 있고 좀 더 훌륭한 삶을 꾸미기 위한 것인데, 이미 그런 문제의 답이 명확히 주어졌다고 전제하는 산업 역군의 사회에서는 그런 고민을 하는 소위 인문 지성은 불필요한 것이고 산업 역군의 감성을 상대로 하는 기쁨조만이 필요한 것이다. 인성 교육의 영역을 감성에 국한하여 이해하는 것은 은연중 인문 지성의 필요를 부인해 왔던 시대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나는 의심한다.

9.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차례가 되어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곧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에 대한 정의를 부정하는 반론을 펼친다. 자기 것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 반론의 요지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속한 신체 부위라도 병들어 썩으면 잘라 낸다. 그렇듯 원래의 자기인 반쪽에서도 좋지 않은 것과는 합치려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인간의 영혼은 아름답고 훌륭한 것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그 갈망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그 갈망은 자신이 충분히 아름답고 훌륭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불완전한 인간의 영혼은 계속 그 갈망을 가지고 존재한다. 아니 아예 그 갈망의 힘이 바로 영혼의 정체다. 그러니까 사랑을 이루는 것은 좀 더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향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말을 다시 해석해서 사랑을 이룬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아름답고 훌륭하게 확대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10.
인간은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되도록 오래 확보하기 위해 영원을 모방하는 짓을 한다. 후손을 남기는 방식 즉 생식 행위를 통해 확보한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 가능한 한 지속되게 하는 것이다. 생식이란 인간이 서로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짝을 찾아 둘의 아름답고 훌륭함을 합쳐 새로운 생명체에 구현해 후세에 남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 간의 사랑은 어쨌든 자식을 생산하는 성교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11.
‘같이 있음’ 또는 ‘만남’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의 syunousia는 때로 성교를 시사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생각한 교육은 synousia라는 말로 아주 적절하게 표현될 수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교육은 성교처럼 사람과 사람이 밀도 높게 만나는 일이다. 그런 만남이 바로 이 글의 주제인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그 만남은 아름다움과 훌륭함에 대한 갈망인 에로스에 의해 성사된 것이기에 그냥 만나는 사람들 서로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는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린 반쪽끼리의 만남에서와 같이 둘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부둥켜안기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만남은 갈망의 대상인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마치 자식을 낳듯이 결실로 만들어 남기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고 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무엇이 아름답고 훌륭한 것인지 인지하고 좀 더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찾아내는 탐구를 핵심으로 하는 일이다. 낮은 단계에서는 덮어놓고 끌리는 것 같아 충동적인 감성만이 작동하는 것처럼 여겨질지 몰라도 정신적인 것에 관심을 돌리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정말 아름다운 것, 훌륭한 것을 그렇지 못한 것, 덜 그런 것과 분간해 내는 지성이 작동한다. 듣기에 좀 이상하겠지만, 그 단계에서의 만남은 지성적인 성교와도 같은 것이겠다.

12.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향연』의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린 것과 같은 결합이 아니라 아름답고 훌륭한 것에 대한 에로스에 의해 추동(推動)되어 좀 더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결실로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플라톤에게서 가르침은 그와 같은 결실을 목표로 젊은이를 성장시키는 내용을 담은 것이어야 함은 당연하다.

13.
오늘날 우리가 차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논의할 때 그 논의가 제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이끌어 주는 것은 좀 더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의식일 것이다. …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논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다. 교육 내용에 관한 문제는 비교적 답이 간단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대학에서는 이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전문 지식을 가르치면 되고, 그 이전 단계의 학교에서는 그 전문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적 바탕을 마련하는 과목을 가르치면 된다는 것이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정답이다. 플라톤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따라 그 답을 해 보라면 사회 발전이라는 만병통치약과도 같은 범용의 구호를 동원하는 대신 사회 구성원 각자가 다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해 주는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고 답을 해야 한다.

14.
실용을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생각한다. 기하학은 다 알다시피 서양 말 geometry의 어원에서 읽어 낼 수 있듯이 고대 이집트의 측량술이 그리스로 수입, 변형되어 탄생한 학문이다. 나일 강 유역의 넓은 비옥한 땅이 있었던 이집트에서 측량술은 참으로 실용적인 지식이었다. 홍수가 난 후 토지를 측량하여 소유권을 재확정해 준다는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는 지식이었다. 그러나 그런 측량할 땅을 가지지 못한 고대 그리스에서 그 지식은 쓸모가 없었다. 그럼에도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지식을 받아들여 그것을 현실의 땅 대신 머릿속에 순수 공간을 구상해 그 위에 도형을 그리고 그 도형들의 관계를 관조하는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그 학문은 참으로 비실용적이었다. 유명한 무한의 공리를 생각해 보자. 무한까지 그은 두 직선이 만날까 또는 만나지 않을까에 관한 언명을 담은 이 공리는 정말 쓸모없는 내용이다. 무한한 크기의 땅도 없고 땅 위에 하릴없이 한없이 직선을 그을 일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삼각형의 두 변의 길이의 합이 다른 한 변의 길이보다 크다는 것을 증명하는 정리도 있다. 먹이를 앞에 놓고 우회로를 택하지 않고 곧장 달려가는 개조차도 아는 것을 짐짓 모르는 것처럼 증명해 보라는 요구는 참으로 한가한 짓이다. 그렇지만 무한을 그리고 우아한 논리적 추론의 절차를 생각해 내는 인간 머리의 지적 모험은 그 자체로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해 보인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체계는 선생과 학생이 만나 지적인 모험을 통해 만들어 낸 아름답고 훌륭한 결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플라톤이 생각한 교육을 통해 이룩된 성취다. 다시 말해 아름답고 훌륭한 것에 대한 갈망을 지닌 인문 지성의 성취다. 눈앞의 실용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런 성취는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