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1월 16일 일요일 아침. 파리 시내 울름가에 위치한 프랑스 최고 명문 고등사범학교 교수 아파트에서 루이 알튀세르는 부인 엘렌느의 목을 마사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열 살이나 위인 부인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발견한다. 그가 마사지를 하던 순간과 “내가 엘렌느를 죽였다”고 깨달은 순간 사이에는 의식의 空洞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곧장 셍트안느병원으로 실려간 것은 부인의 시신이 아니라 알튀세르 자신이었다. 그의 정신과 담당의사 르네 디아킨은 그 순간 그가 정신착란 상태였으므로 그에게 살인책임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사법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은 알튀세르는 그후 1990년 가을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살아 있는 죽은 자’였다. 법적 권리가 없어지고 어떠한 문서에 서명할 권리마저 빼앗겼다. 그러던 그가 사후 1년6개월 만에 입을 열었다. 의료기록의 비밀보장 때문에 재판이 끝난 후에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던 그의 얘기가 그가 구술해놓은 원고에 의해 자서전으로 출판된 것이다. 파리의 전통 깊은 출판사 스톡과 4만~5만장에 이르는 알튀세르의 모든 문서를 기증받아 보관하던 현대출판기념연구소(IMEC)가 공동으로 출판한 이 책은 프랑스가 낳은 금세기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 바람을 프랑스에서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출간된 지 한달도 못돼 평론가들은 이 책이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 《마르크스를 위하여》보다 더 오래 남을 것으로 평가한다.

드골의 어록에서 제목을 따온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오래 전부터 그의 이론과 이론적 배경, 즉 그의 삶을 연구하던 얀 물리에 부탕의 요청에 따라 알튀세르는 자신의 인생을 구술했다. 또 이 자서전의 출간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직접 서문까지 썼다. “나는 그 자체로서는 관심도 끌지 못할 내 인생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심리적 지각이 그러하듯이 나의 고뇌에 환영적으로 투영되어 내가 지각하고 느낀 대로만을 이야기 하겠다. … 단지 나에게 일어났던, 아직도 끝나지 않은 미궁의 미스터리를 좀더 잘 보려는 의도에서일 뿐이다.”

알튀세르가 처음 정신과 치료를 받은 때는 그가 30세였던 1948년경이다. “이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느껴 열렬히 사랑한 부인 엘렌느 리트만 레고티엥. 그와 처음 사랑의 행위를 나눈 직후부터 그는 죽을 때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그의 병명은 ‘조기 심신 상실’과 ‘극심한 우울증’. 평생 동안 전기충격 요법을 받고, 신경 안정제와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했다. 때로는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정신병동에 격리되기도 했다. 그 원인을 이 자서전은 바로 원초적인 데서 찾는다.

1918년 알자스에서 이주해온 알튀세르와 베르제 두 가문은 알제에서 인연을 맺는다. 자기가 죽도록 사랑한 연인을 1차 대전으로 잃은 신부가 연인의 큰형과 결혼한 것이다. 아들에게 연인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준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연인의 환영을 본다. 무일푼이었다가 큰 은행의 대표가 돼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아버지 역시 어린 알튀세르에게는 ‘자연적 본능’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지 못했다. 성녀 같은 어머니는 그에게 모든 육체적 접촉을 금지시켰다.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체제의 가장 억압적인 형태는 가정과 학교”라고 그는 되풀이 말했다. 그는 ‘자연적 본능’에 억압 받은 자기가 ‘이상’만을 향해 줄달음 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술회했다. 그가 2차대전 때 독일군 포로가 돼 수용소에서 열렬한 공산주의자에게 쉽게 매료된 것도 이같은 ‘이상’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