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문제들은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말에 흔쾌히 동의한다. 왜 고난이 존재하는가에 관한 모든 논리적 물음들이 해결된다고 해서 고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는데 이론적 탐구의 결과를 자꾸 들이미는 것은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다.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를 다루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성경적이다. 고난은 ‘해결’(solution)이 아니라 ‘해소’(dissolution)되어야 한다.”
2. 김기현의 글을 읽고, 두 가지가 떠올랐다. 1)원인의 가늠(아리스토텔레스)과 역학적 통제(갈릴레이). 그리고 2)예전에 적은 문장. “그(비트겐슈타인)는 철학의 문제를 해결한다기 보다 해소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언어가 빚어낸 혼란의 청소였다.”
3. ‘역학적 통제’(자연과학)가 문제 해결과 ‘원인의 가늠’(형이상학)이 의미 해소와 상응한다면, <논고>는 철학을 지우고 철학을 요한다. 이 지점이 바로 알 수 없는 영역, 즉 경험의 수수께끼이다.
4. 무스타파 몬드는 고통의 해결과 해소, 둘 중에 무엇을 지향하는가. 후자라 여겨진다. 약을 먹고 두통에 무딘 건 행복이 아니다. 멋진 신세계는 철학을 지우고 철학을 요하는 지양(止揚, aufhebung)을 청구한다.
5. “온갖 근심 걱정을 털어버리고 행복감을 느끼도록 해주는 약을 언제든 먹을 수 있지만 그런 삶은 왠지 인간답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일은 결코 가치의 문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문제 해결이라는 것은 그 문제를 넘어선 어떤 목적을 향한 과정이지 문제를 없애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기계적 사유와 인간적 사유의 중요한 차이이기도 합니다.”
6. 더러, 해결도 해소도 아닌 제3의 무언가를 떠올리면 구멍 큰 사어라 할만한 변증법을 지목한다. 문제를 인정하거나 그것을 부인하거나, 문제를 극복하거나 그것을 소거하거나, 양자를 위에서 아우르거나 그 사이에서 어우르거나 하는 건, 누군가 지나온 길이다.
7. 더이상 무엇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문제를 푸는 것도, 없애는 것도 아닌 다시 말해 애당초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