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책은 일본의 중국사학자 오카다 히데히로의 <<だれが中国をつくったか(누가 중국을 만들었는가)>>를 번역한 것이며, 한국어판 제목은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이다.” … “중국에서 역사가 성립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저자가 본서를 집필한 목적이다.”

2. “저자가 ‘누가 중국을 만들었는가’라고 물었을 때 염두에 두고 있는 중국 개념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중국은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전국통일을 달성함으로써 만들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물론 시황제의 전국통일 이전에도 중국은 여러 문헌에 걸쳐 사용되고는 있었다. <<시경詩經>>과 <<서경書經>>과 같은 오래된 문헌에서는 중국이 사국四國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기재되어 있다. 여러 성읍국가들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성읍국가를 가리키는 공간적 개념으로 중국이란 낱말이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 중국은 일개 성읍국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황하黃河 중하류 유역을 지칭하게 되면서 그 공간적 범주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후 시황제는 이 지역을 분점하고 있던 여러 중소 국가들을 병합하여 전국시대를 종식시켰는데, 이로써 중국이란 낱말에는 질적인 전환이 이뤄진다.”

3. “하나의 체제regime를 존속시키는 데는 무력과 권위가 요구된다. 즉 체제에 맞서는 저항세력을 강제할 수 있는 무력과 더불어 체제의 통치권 행사를 피지배자들이 인정하고 납득할 수 있게 해주는 정당성으로서의 권위가 필요한 것이다. 양자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상호 보완적이기 때문에 이 중 어느 하나가 결여된다면, 그 체제의 통치권 행사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체제 자체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시황제의 전국 통일과 그것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뚜렷하게 발견한다. 시황제는 강력한 군사력을 사용함으로써 ‘중국’이라는 체제를 건립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권위를 수립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시황제 사후 체제의 붕괴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4. “‘사史’라는 단어는 ‘중中’과 ‘우又’가 합쳐져서 생겨난 글자로 오른손에 문서 꾸러미를 들고 있는 사람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의 본래 의미는 역사가 아닌 관리의 장부를 가리키며, 장부에 매일 일어나는 사건을 기록하는 이가 바로 사관史官이다. 이는 중국에서 역사가 국가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는데, 시황제 이후 중국이라는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해 그것을 정당화하는 권위로서 도입된 것이 바로 역사인 것이다. 그리하여 한漢 무제武帝 치세에 들어서서 규모있고 체계적인 형식에 따라 정교하고 장대한 구조를 갖춘 역사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니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기史記>>가 그것이다.”

5. “<<사기>>는 문명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황제黃帝에서 출발하여 역사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한 무제의 치세에로 전개되어왔는지를 다루고 있다. … 사마천은 먼저 신화의 세계에 속하는 <오제본기五帝本紀>를 <<사기>>의 첫머리에 배치하고, 천자가 천하를 다스리는 근거는 단순히 무력의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닌 천명天命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즉 덕치德治를 펼치는 통치자만이 천자로서 천명을 수여받아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얻으며, 그 통치자가 덕치를 펼치지 않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다면 천명은 덕치를 펼치는 다른 통치자에게로 이행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6. “실제 역사의 전개과정은 끊임없는 변화를 그 특징으로 한다. <<사기>>의 서술방식, 즉 이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세계가 있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사실들을 선별하여 기술하는 태도를 고수하다 보면, 현실세계가 변화하더라도 이를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이러한 문제는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에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절정을 맞이하였다.”

7.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004년 북송北宋과 요遼 사이에 체결된 전연澶淵의 맹약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두루 알다시피, 전연의 맹약이란 북송이 요와의 전쟁에서 패한 결과 양국 사이에 맺어진 화의인데, 북송의 황제인 진종眞宗이 요의 황제인 성종聖宗을 아우로 대하는 동시에 매해 정해진 양의 세폐歲幣를 바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사안은 정통 황제라 자임하던 북송의 황제가 자신 이외의 통치자를 황제로 승인했다는 데 있다. 이는 유일한 정통 황제가 천하를 통치한다는,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한 이래 굳건하게 믿어져 왔던 관념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음을 뜻한다. 이에 대한 반동에서 일어난 것이 중화사상中華思想이며, 이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문헌이 바로 사마광의 <<자치통감>>이다.”

8. “중화사상의 등장은 무력과 권위를 두 계기로 하여 수립되었던 중국이란 체제가 새로운 전환을 맞았음을 뜻한다. 무력으로는 더 이상 북방민족과 비교하여 우월성을 차지하지 못하는 역사적 상황에서 사마광은 무력을 탈각시키고 정통이라는 권위를 한층 더 강화시키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로써 통치의 수단으로 역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이전의 무력적 요소까지도 포괄하는 지위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겠다. 중국이란 체제는 역사만으로도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이란 체제가 ‘정통’과 ‘중화사상’의 결합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제 저자의 질문에 답변할 때가 되었다. 누가 중국을 만들었는가? 그들은 바로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이다.”

* 무력(秦)에서 무력과 권위(漢)로, 그리고 권위(北宋) 그 자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