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칸트는 경험적 현상의 세계(현상계) 저편을 ‘물 자체’로 불렀다. 이런 존재론적 구도는 라캉에게 그대로 전유되어 칸트의 현상계는 상징계로, 물 자체는 실재(le réel)로 새롭게 명명된다. 라캉이 대상관계 이론을 중시했음을 환기하자. 대상관계 이론에서 욕망의 원인은 리비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관계에 있다. ‘사물’(das Ding)은 상징계 저편, 다시 말해서 쾌락원칙과 그것이 대변하는 도덕법칙 너머로 향하는 무의식적 욕망(죽음충동)의 대상을 개념화할 필요성에서 온 용어다. 이런 필요성에 상응하는 라캉의 노력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욕망의 대상원인은 최종적으로 ‘환상대상 a(objet a)’로 명명된다. 그런데 대상관계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와 대상의 거리다. 욕망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되 관계가 너무 멀거나 가까우면 욕망이 소멸하거나 과잉에 이른다. 라캉은 대상관계 이론의 관점에서 쾌락원칙의 기능이 주체와 사물 사이의 거리를 규제하는 데 있다고 정의한다. 즉 주체와 사물의 거리가 적절히 유지될 때 심리적 장치의 자극이 평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B. 라캉은 인간의 본질은 욕망에 있다는 스피노자의 테제를 끝까지 고수했고, 코제브의 강력한 영향 아래 욕망에 대한 헤겔의 두 가지 테제를 발전시켰다. 헤겔의 욕망 개념은 라캉의 무의식 이론에서 그대로 수용되어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명제로 압축된다. 즉 욕망은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욕망하고 마침내 스스로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고자 열망한다. 라캉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이 정확히 헤겔적인 공식임을 표명한다. “내가 무의식은 대문자 A로 표기되는 대타자(Autre)의 담론이라고 말했다면, 이는 욕망의 인정과 인정의 욕망이 서로 얽혀가는 저편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헤겔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라캉에게서도 욕망은 인정의 욕망이고, 주체는 어떤 희생과 소외를 통해서만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노예적 주체다. 헤겔에게 주체가 노동의 세계로 소외된 노예적 주체라면, 라캉에게 주체는 언어의 세계로 소외된 말하는 주체다. 주체는 언어의 지배를 받아들인다는 조건에서 비로소 의미의 차원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의 존재(parlêtre)’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주체는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팔루스)다. 말하는 주체는 자신의 존재를 상실한 주체, ‘존재 결핍(manque-à-être)’을 겪는 주체다. 주체는 말의 세계로 소외되는 덕분에 의미 전달의 능력이나 합리적 사고의 능력을 얻지만, 그 대신 자신의 존재를 희생해야만 한다. ‘말의 존재’와 ‘존재 결핍’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 없는 동일한 사태의 두 측면이다. 그러므로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선언하던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렇게 고쳐 써야 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따라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라캉이 이 새로운 코기토 공식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이 사유와 존재의 구조적 불일치에서 성립한다는 점이다. 즉 욕망이란 인간이 상호주관성을 근간으로 하는 문화적 질서 속으로 편입되면서 필연적으로 포기해야 존재 결핍에서 오는 ‘존재의 정념(une passion de l’être)’이다. 라캉은 “그것이 있었던 곳으로 나는 돌아가야 한다(Wo es war, soll ich werden)”라는 프로이트의 공식을 이런 관점에서 정신분석의 윤리를 향도할 도덕적 명법으로 끌어올린다.

C. 도착적 주체는 어떻게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이런 윤리적 이행의 문제에 대해 라캉은 ‘승화(sublimation)’라는 말로 답한다. 라캉에게서 승화는 대상이 ‘사물(das Ding)’의 자리로 옮겨갈 때, “사물의 존엄한 위치로 상승할 때”(S7 133)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것이 함축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먼저 그것은 숭고한 성질(sublime quality)이 대상 내재적 속성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숭고성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위치일 뿐이다. 대상의 자리가 ‘사물’의 자리와 겹치게 되는 것이 숭고다. 도착과 승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물’의 자리에 놓이는 것이 주체일 때와 대상일 때의 차이다. 즉 대상이 사물의 숭고한 위치로 자리를 옮기면 승화가 된다. 그러나 반대로 주체가 숭고한 자리를 차지하면 도착이 되는 것이다.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숭고한 위치에 오르면 욕망은 도착적일 뿐이 아니라 범죄적이 되어버린다. 향락과 숭고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향락 속에서 주체는 ‘사물’ 속으로 함몰해버린다. 주체와 사물 사이에 거리가 소멸해버리는 것이다. 반면 승화에서는 주체와 숭고한 사물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유지된다. 라캉은 승화의 탁월한 사례로 중세의 궁정식 사랑을 들었다. 연인을 숭고한 사물의 자리에 놓되 엄격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궁정식 사랑이라는 것이다. 향락의 주체는 궁정식 사랑의 주인공처럼 자신이 함몰해가는 숭고한 대상에 일정한 거리를 둘 때 윤리적 이행을 기대할 수 있다. 도착적 욕망의 주체는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숭고한 ‘사물’의 자리에서 벗어날 때,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대상을 옮겨놓을 때 윤리적 주체로 이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