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3. 자존감은 스펙트럼 형태다. 한쪽 끝에는 무조건 나를 숭배하라는 독재자 스타일의 나르시시즘이 있고 다른 한쪽 끝에는 극단적인 자기혐오가 있다. 극단적인 자기혐오도 실은 나르시시즘이다. 부정적인 나르시시즘인 것이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를 뒤집은 것. (중략) 이 책은 중간 지점에 당도하기 위한 것이다. 딱 중간이면 된다. 중간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자신에 대해서만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데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 즉 최고점과 최저점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나, 나, 나’로 해석한다. 독재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봐라. 나는 대단하니까! 나는 저기 저 불완전한 사람들이 싫다. 저들은 열등하니까.” 자기혐오를 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보면 눈을 가려라. 나는 흉측하니까! 나는 저기 저 불완전한 사람들이 싫다. 저들을 비웃으면 내가 살짝 우월하게 느껴지니까. 가만, 그런데 내 이빨이 저 사람들 이빨보다 누런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러한 터널 시야(tunnel vision)는 지루하고 일차원적이며 건방지다. 강박적으로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이든 벌을 주는 것이든 자기에게만 빠진 사람은 자기 자신 외에는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중간이 되면 우리는 침착하게 나 아닌 다른 것을 볼 것이다.”

56. ‘미네소타 쌍둥이 가족 연구’(1979)는 출생 시 혹은 출생 후 얼마 되지 않아 헤어져 서로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자랐다가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수천 명의 쌍둥이를 비교 연구했다. 독일에서 나치 정권에 동조한 카톨릭계 가정에서 자란 오스카와, 트리니다드에서 유대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 가정에서 자란 잭도 그런 쌍둥이였다.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오스카와 잭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특성을 보였다. 둘 다 습관적으로 손목에 고무밴드를 차고 다녔다. 둘 다 볼일을 보기 전과 후에 변기 물을 내렸다. 둘 다 버터 바른 토스트를 커피에 적셔 먹기를 좋아했다. 둘 다 사람 많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재채기를 했다. 오스카와 잭은 그런 매우 개인적인 특성을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회백질 모양은 경험에 따라 일생에 걸쳐 변화를 거듭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전혀 다른 가정에서 자란 두 남자가 그렇게 독특한 버릇을 가질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미네소타 연구는 이와 유사한 놀라운 사례를 상당수 발견했다. “그 서판에 무언가가 쓰여 있다”라고 스티븐 핑거는 단언한다.

58. 화가 폴 세잔도 비판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해서 젊은 나이에 이미 에코르셰 - 미술에서 근육 골격 연구를 위해 피부를 벗긴 인체 그림 -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이 이름은 세잔이 거푸집을 갖고 있었던 조각상 이름이기도 했으며 그는 반복적으로 피부가 벗겨진 사람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59. 본성과 환경은 우리의 자아상을 형성하는 데 동시에 작용한다. 낮은 자존감 유전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간질이 있는 사람이 악령이 씌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처럼 우리를 해방시키는 면이 있다. 낮은 자존감 유전자의 가능성은 자기혐오를 하나의 증후군,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분자의 결합이라는 개념에 과학적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자기혐오를 초래한 환경적 요인을 살펴보는 것 역시 우리를 해방시킨다. 반짝하고 떠오르는 순간을 찾아 기억 속을 더듬어 보며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됐지?” 떠오르는 각각의 일화가 증거가 된다. 그 증거를 찾으면 우리는 이렇게 외친다. “유레카! 이제 알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묻는다. “그걸 아는 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지?” 어떻게 이렇게 되었든 우리에겐 모두 한 가지 목표만 있다. 그 목표에 이르는 길, 우리가 해야 할 실천은 이것이다. 자신을 미워하는 걸 중단하기. 바로 지금부터.

78. 우리의 뇌는 바뀔 수 있지만 변화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뇌에는 이미 ‘부정적 편향’이 내장돼 있기 때문이다. 이 부정적 편향 때문에 뇌는 긍정적 경험에서보다 부정적 경험에서 더 손쉽게 배우고 더 영구적으로 저장한다. 이것은 몸이 미래를 위해 위험한 징후를 기록해두는 자연적 생존전략이다. 진화하는 생물체에게는 ‘배고픈 사자는 문다’는 정보를 기억하는 것이 ‘꽃은 예쁘다’고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 그래서 우리는 신경학적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혼나는 것 같은 나쁜 경험을, 홈런을 치는 것 같은 좋은 경험보다 더 뚜렷하게 더 오래 기억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두 가지 일이 같은 날 일어났고 두 가지 경험의 순간에 정확히 똑같이 격렬한 감정을 느꼈다고 해도 말이다.

89~90. 우리를 향했던 공격의 대부분은 우리 자신과 무관한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불만, 수치심, 분노를 던져 넣는 통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자기혐오, 아픔, 자기공포를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었다. 우리는 그저 무기력한 행인, 소비자, 관찰자였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타자가 우리에게 권력을 행사하자 우리는 자주성, 주체성을 잃었다. 우리는 위축됐다. 우리는 사라졌다. 우리는 자신을 저버렸다. 정신의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영혼 살해’라 부른다. 정신의학자 레너드 쉔골드Leonard Shengold는 이 주제에 대한 주목할만한 저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영혼 살해는 진단명이나 이상증세가 아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범죄행위에 해당하는 정황을 지칭하는 드라마틱한 용어다. 타인의 독립된 정체성을 말살하거나 위태롭게 하는 고의적인 시도다.” “영혼 살해의 피해자는 상당 부분 타인에 의해 소유당한 채 산다. 타인에게 영혼이 예속된 상태다. 일어났던 일과, 지금은 지워졌거나 도외시된 경험들이 유발한 끔찍한 감정은 세뇌에 의해 억압된다. 이처럼 감정을 회피해야 할 경우 나쁜 감정뿐만 아니라 좋은 감정도 같이 무뎌진다. 따라서 누군가의 영혼을 살해한다는 것은 피해자로부터 기쁨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91. 헨릭 입센의 1879년 작 <인형의 집>에서 오랫동안 고통받아온 주부 노라는 독선적이고 자기애가 강한 남편 토르발에게 자기 영혼의 살해자 중 하나라고 말한다. “아빠와 함께 살았을 때 아빠는 내게 모든 의견을 말해줬어요. 그래서 나도 같은 의견을 가졌죠. 아빠와 의견이 다를 때는 내색하지 않았어요. 아빠가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빠는 나를 인형이라고 부르며 나하고 놀아줬어요. 내가 인형을 갖고 놀 듯이요. 그러다가 당신과 결혼해 함께 살게 됐는데 … 나는 아빠의 손에서 당신 손으로 옮겨진 것뿐이에요. 당신은 만사를 당신 취향대로 했어요. 그래서 나도 당신과 같은 취향을 가졌죠. 아니면 그런 척했거나.” 노라가 말한다. 그 취향은 실제로 누구의 취향인가? 노라의? 아니면 토르발의?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 나는 그저 당신을 위해 재주를 부리는 존재에 불과했어요, 토르발 … 당신과 아빠는 내게 큰 죄를 지은 거예요.” 노라는 격분한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건 당신 탓이에요.”

261. 자기 밖에 모르는 가차 없는 내면의 비평가가 내뿜는 부정적 나르시시즘

262. 자기혐오에는 용어집이 있다.

_ 애널리 루퍼스, 이재희 옮김, <이젠 내가 밉지 않아>, 마디,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