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한 때 자신을 ‘마술적 사실주의’라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는 리얼리즘 작가로서 현실을 다뤘고 무엇보다 그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작가로 성장하던 1950년대의 소설에서는 서사가 사라지고 있었다. 당시 주목받던 누보로망(Nouveau Roman) 작가들은 현상학적 인식을 토대로 파편화된 소설을 기획하면서 이데올로기에 종속될 수 있는 과거 소설의 관습을 타파하려 했다. 다시 말해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인과관계를 갖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인식을 미시적으로 서술해 독자가 의미를 생산하게끔 만든 것이다. 그런 새로운 시도가 어떤 문학적 가치를 갖는지와는 별개로, 점점 문학이 난해해지면서 대중은 문학과 유리돼 갔다. 다시 말해 뚜렷한 메시지를 잃어버린 작품들이 소설의 주류로 등장하면서 기존 소설의 죽음이 거론됐던 것이다. 그런 때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혜성처럼 등장해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에 밀란 쿤데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소설의 종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동유럽이나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에게 이러한 말은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 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