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 “작품 속에서 부시를 비판할 때마다 터져나오는 장내의 웃음이나 박수는, 상영 전후 무어 감독을 향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상영중의 야유에 가까운 웃음에서는, 양질의 지성이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거북함은 거기에서 기인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부시가 상대를 업신여길 때 짓는, 품성이 결여된 경박한 웃음과 어딘가 깊은 곳에서 통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중략) 사실 내가 봤을 때 <화씨 9/11>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숭고한 뜻에 힘입었대도, 찍기 전부터 결론이 먼저 존재하는 것을 다큐멘터리라고 부르지는 않으련다. 찍는 것 자체가 발견이다. 프로파간다와 결별한 취재자의 그런 태도야말로 다큐멘터리라는 방법과 장르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공격하는 것 같은 작품을 만들어, 잠깐 동안 보는 이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은 고작 제작자의 자기 만족에 불과하다. 오히려 진짜 적은, 이러한 존재를 허용하고 지지한 이 나라의 6할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고이즈미적인 것’이고, 그 병소를 공격하지 않고 안전지대에서 고름(고이즈미)만을 찔러 짜낸대도 병세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