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다닐 때 /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 포항여고 그 계집애 / 어느 날 누이동생이 /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 가져 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 허연 달빛 아래서 /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 눈물도 안 흘리고 왜 /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 나는 왜 나인가 / 나는 왜 나인가 /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 깎아댔다

_ 박남철, <첫사랑>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