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누릴 수 있는 그러한 행복의 자유에는 가혹한 시련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지도교수인 ‘아바스타도’와 면담할 때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내가 어떤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건 동의하겠지만, 연구방법은 반드시 기호학이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강조한 것이다. 나로서는 그의 요구가 너무나 뜻밖이어서 앞으로 어떻게 논문을 써야할지 막막해지기만 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기호학에 무지했을 뿐 아니라, 그 방법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 연구에 필요한 연구방법이라면 기껏해야 바슐라르의 상상력 이론이면 충분할 것으로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에게 그 교수의 엄격한 주문은 나 스스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학생’임을 깨닫게 했다. 또한 그 교수가 초현실주의에 대한 두 권의 책을 쓴 사람이라는 정보만 갖고, 그 대학의 기호학 연구소 소장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나의 불찰이라는 자책감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또 다시 지도교수나 대학을 바꿀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의 세미나에 참석하고 그 대학의 기호학 강의들을 청강하면서 기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가 고행처럼 생각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공부가 재미있어야 하는 데, 무엇 때문에 이런 방법이 필요한 것인가 하는 회의가 가시지 않아 공부의 진척이 순조롭지도 않았다. 그런 가운데 문학작품의 형태적 중요성과 그것의 분석적 시각의 필요성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것은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지도교수의 불어권 아프리카 소설들의 기호학적 분석에 관한 강의를 들은 것은 완전히 새로운 학문세계에 진입한 것 같은 개안의 경험이 되었다. 그러나 연구방법에 대한 그의 요구 때문에 엘뤼아르의 시를 포기하고 초현실주의의 핵심인 브르통의 산문 텍스트를 논문 주제로 삼게 된 것은 큰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뒤늦은 결정은, 단순한 감성적 선택이 삶의 방향을 얼마나 크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한 운명적 사건이 된 셈이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가지 않은 길’을 뒤늦게나마 가게 되어 운명의 전환뿐 아니라 학문적 수확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변화 외에도 중요한 것은 파리에서 푸코의 책을 발견하게 된 점이다.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읽게 된 ‘감시와 처벌’은 감동과 전율이 느껴지는 독서 체험을 갖게 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정보화 사회는 거대한 감옥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 인간은 감옥의 죄수처럼 감시받고 있으며,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기록되고 평가되고 서열화된다”는 메시지를 강력한 웅변으로 들었다. 나는 귀국하면 푸코를 소개하고 연구하는 일을 앞으로 추구해야 할 과제로 삼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하기도 했다. 프로스트의 또 다른 시, ‘눈 내리는 저녁 숲에 멈춰 서서’의 마지막 구절처럼, 그 일은 나에게 쉬지 않고 ‘가야 할 먼 길’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약속을 과연 얼마나 지킨 것일까?

오 명예교수는 “이 책으로 푸코 연구를 마감하고 싶지는 않다”고 밝혔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내리는 저녁 숲에 멈춰 서서’의 마지막 구절 ‘쉬지 않고 계속 가야 할 먼 길’이 자신에게는 한국에서 푸코를 소개하고 연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오 명예교수는 “그의 책을 읽고 새롭게 떠오르는 사유의 경험을 갖기 위해서라도 (연구를)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