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봄이었다. 무작정 남쪽으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긴 겨울이 끝났다는 기쁜 마음이 있었고 오래 다니던 직장을 막 그만두었던 시기라 허허로우면서도 막막한 마음도 얼마쯤 있었다.

새벽, 차를 몰로 고속도로에 올랐다. 대전 지나 함양쯤 갔을까. 환기를 시키려 창을 열었는데, 내가 떠나온 서을과는 공기부터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 탓인지 아니면 온도나 습도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야 알 길이 없었지만 봄 냄새가 분명하면서도 선연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햅쌀을 불려놓은 물처럼 구수하고, 땀 흘리며 자고 있는 아이의 이마 냄새처럼 새큼하면서도, 오래 묵은 양주를 처음 열었을 때처럼 퍼지는 알싸함. 물론 이런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만약 내가 조향사라면 봄 냄새를 닮은 향수를 만들어낼 것이다.

오전, 남해의 한 마을에 도착한 나는 바다의 푸른빛과 하늘의 푸른빛을 번갈아가며 눈에 담아두었다. 한참을 지나서야 허기를 느꼈는데 아쉽게도 근처에 아침을 먹을 만한 밥집은 하나도 없었다. ‘봄도다리’나 ‘도미’같은 제철 횟감을 큰 글씨로 써서 붙여둔 횟집들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오전부터 문을 연 곳은 없었고 설사 문이 열려 있다고 해도 혼자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차로 얼마간을 더 가면 멸치쌈밥으로 유명한 집이 있었다. 양념장과 함께 오래 졸인 생멸치를 여러 쌈 채소에 싸먹는 음식. 나도 두어 번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멸치가 이렇게 크고 맛있는 생선이었구나 하고 놀라곤 했다. 문제는 그 집 역시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시간이었고 게다가 1인분은 팔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생각해낸 것이 학교 근처로 가보자는 것이었다. 학교 근처에는 늘 분식집이 있고 그런 분식집이라면 간혹 아침부터 장사를 시작하는 곳도 있으니 말이다.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아도 학교 근처 분식집에는 아침을 거르고 집에서 나온 아이들이 깁밥이며 라면을 사 먹는 경우가 많았다. 내비게이션으로 가장 가까운 학교를 찾아갔다. 한 여자중학교였고 학교 근처에는 내 생각처럼 분식집이 하나 있었다.

나무 미닫이문을 열고 분식집에 들어갔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중년의 남자와 몸이 불편해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둘은 동시에 “네” 하고 대답했다. 남자는 단호한 말투였고 여자는 어눌한 말투였다. 나는 메뉴판을 오래 보다가 김치찌개를 하나 시켰다.

여자는 뇌졸중 후유증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몸의 절반은 봄 같았고 남은 절반은 겨울 같았다. 더듬거리는 말로 남자에게 이것저것을 말했고 남자는 그녀의 말을 곧잘 따랐다. 내 테이블에서는 건너편 주방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남자는 여자가 시키는 대로 뚝배기를 올리고 육수를 붓고 돼지고기와 김치를 넣었다.

그때 다툼이 시작되었다. 조미료를 넣지 말라는 여자의 말과 조미료를 넣지 않으면 맛이 안 난다는 남자의 의견이 팽팽하게 엇갈렸다. 둘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힐끔힐끔 주방을 보던 나는 무안한 마음에 분식집 벽면에 가득 적혀 있는 학생들의 낙서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돌 멤버 이름 뒤에 하트를 그려넣은 것이나 친한 친구들의 이름을 적어두고 사랑한다거나 영원하자는 말을 덧붙인 낙서가 대부분이었다. 장난스러운 말투로 ‘애인 구함’이라 적은 낙서 같은 것도 있었다.

그사이 김치찌개가 나왔다.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첫술을 떠보았는데 놀랄 만큼 맛이 좋았다. 조미료 맛이 나지 않은 것을 보면 결국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한참 밥을 먹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내가 찌개를 어떻게 먹고 있는지 궁금한 듯 이번에는 그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 것에 열중했다. 단숨에 뚝배기를 비웠다. 그 모습을 보고 그제야 그들도 안심하는 눈치였다. 나는 휴지로 입을 닦으며 아이들의 낙서로 가득한 벽면에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작게 적어두고 그곳을 나왔다.

_ 박준, “알맞은 시절”,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난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