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시를 읽거나 쓸 때, 시란 행복 없이 사는 일의 훈련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중략) 문제는 주어진 磁場 속에서 주어진 磁性을 띠고 안주하려는 정신과 대결하려는 자세에 있을 것이다. 그 자세가 개성을 낳고, 개성이 진부함이 아닌 신선함을 만들어 주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자세를 존중하는 정신이 바로 예술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李晟馥의 시를 읽고 당황한 사람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지난 십여 년간 우리가 길들여져 있는 몇 가지 유형의 시 어느 것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그는 金洙暎과 비슷하면서도 金洙暎에게서 볼 수 있는 思辨的인 요소를 극도로 줄이고 있다. 그보다는 자유로운 聯想과 그 연상을 따르는 意識이 그의 主調를 이룬다. 그 연상은 그러나 심리적으로 긴밀한 연결의 고리를 가지고 있는 연상이다.

_ 황동규, “幸福 없이 사는 훈련 - 李晟馥의 시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