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트 불가리자시옹(haute vulgarisation)라는 불어 표현이 있다. 우리말로 하면 ‘고급 통속화’랄까.

2. ‘역사를 위한 변명’을 쓴 마르크 블로흐(1886-1944)는 “역사가란 인간의 살 냄새가 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식인귀와 같다’고 말했다.

3. 2차 대전에 참전했던 브로델은 이 책 <지중해>를 포로수용소에서 썼다고 한다. 놀라운 점은 총 1600쪽에 이르는 이 육중한 분량을 여러 차례에 걸쳐 다시 썼다는 것. 원래 이 책은 브로델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 지도교수는 초고를 보고 “독창적이고 탄탄하고 적절하다”고 칭찬하는데, 정작 학생은 그 순간 처음부터 다시 쓰고 있었다는 것.

4. “브로델 스스로 화가 마티스(1869-1954)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마티스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선(線)이 있었다고. 한 번 슥 긋고, 마음에 안 들면 버리고. 또 한 번 슥 긋고 다시 버리고. 이렇게 500번을 그어서 원하는 선을 얻었다는 것이다. 치열한 사람들은 이렇다. 쓰다 보니 나중에 더 훌륭한 프레임을 알게 되고, 그러니 처음부터 다시 쓸 수밖에 없다. 선학(先學)들의 치열함이다.”

5. “팩트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나 역시 구글과 위키피디아를 활용한다. 하지만 그건 출발일 뿐. 요즘 ‘창발(創發)’이란 말을 많이 쓰던데, 낮은 차원의 디테일 모았다고 높은 차원의 작품 나오는 건 아니다. 기계적으로 팩트를 외운다면 그건 퀴즈왕이지. 전문가와 퀴즈왕은 다르지 않을까. 전문가는 팩트를 연결해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깊이는 시간과 함께 쌓인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보라. 단순히 테크닉 차원이 아니라, 장구한 시간 동안 쌓아온 깊이가 있다. 일생일서(一生一書)라는 말이 있다. 한 인생에 하나의 책. 노자처럼, 브로델처럼. 지금 세상에서는 찾기 힘든 덕목이지만, 치열함과 묵중(默重)함에 대한 존경은 필요하다. 그 가치가 무시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6.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은 실제 작동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허구다. 그런데도 허구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아마 이들이 자신만의 가치라고 믿는 것들을 찬찬히 살펴본다면, 80%가 일치하는, 공유하는 가치일 것이다.”

_ 주경철 교수 + 어수웅 기자, 조선일보 2017/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