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메논을 기점으로 라캉과 엘리스 그리고 헤스컷을 경유해 얽매임에서 벗어나 탁월함에 이르는 길 _ “가장합시다”(C. S. 루이스)

2. 협곡의 횡단. 리주토의 <살아있는 신의 탄생>에 토대한 ‘하나님 이미지’ 치유의 사전/사후 진단

3. 역사적 인과율은 어쩌면 일종의 전가요 안주다. 그래, 애석하게도 누군가 유리창을 깼다. 그런데 왜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는가.

4. 여기에 부르디외와 루만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렇다면 언제 각성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헐벗음이 실존을 위협할 때가 아니라 다른 사회를 지향할 때이다. 다만 문제는, 각성이 언제나 이미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에서 뛰어라!”를 대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과거 나치 체제 하에서 비판 이론을 앞세운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맞닥뜨린 한계가 바로 이점이었다. 부정 변증법은 “폭발적인 부정성 및 저항과 전복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작 그 자신이 기존의 긍정적 질서에 기생하게 되는 일만은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Žižek, 2009: 15). 설령 주체가 각성을 경험한 뒤 니체의 초인(超人)을 따라 이상적인 삶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자아 내지 정체성은 구조가 부여하는 위치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로 얽혀져있기 때문에, 제 아무리 현실을 초극한다 한들 체제의 변화를 동반하지 못한다면 무기력한 니힐리즘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가라타니 고진이 지적하듯, 사회의 상식과 관념은 우리가 각성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 현실의 변혁 없이 넘어설 수 없는 ‘초월론적 가상’이다. 가령 상품 물신주의는 대중의 내면에서 생성된 탐욕의 발로라기보다는 사회적 현실 속에 배태된 욕동이라고 할 수 있다(柄谷行人, 2005). 다음의 예화는 이에 대한 유용한 설명을 제공한다. “우리는 상품 물신주의에 대해 수강한 부르주아 주체를 상상할 수 있다. 강의가 끝난 후 그는 교수에게 자신은 여전히 상품 물신주의의 회생자라고 불평한다. 그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사태의 진상이 무엇인지, 상품은 단지 사회적 관계의 표현일 뿐이며 거기에는 어떤 신비한 힘도 없다는 것을 알지 않소!’ 이에 대해 수강생은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잘 압니다. 하지만 내가 취급하는 상품은 그걸 모르는 것 같거든요.’(Žižek, 2007: 145~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