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중국사상사론(3부작)의 저자, 李澤厚

“1930년 후베이 성 우한에서 우체국 상급 직원이던 아버지와 소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죽어 홀어머니가 고생하면서 리쩌호우 형제를 교육했지만, 어머니도 40세가 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호남성립제일중학에 합격하고도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학비가 면제되는 호남성립제일사범학교를 다녀야 했다. 1950년 북경대학 철학과에 입학할 당시 중국 대학은 사상 개조 운동에 동원돼,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러시아어 외에 학과 과정은 거의 개설되지 않았다. 그는 독학으로 담사동과 강유위 등 근대 개혁 사상가들을 연구했다. 이 무렵 리쩌호우는 여전히 어려웠던 경제 사정과 지나친 독서 때문에 폐결핵에 걸려 각혈까지 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에는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에 배속돼 연구에 종사했다. 스물여덟에 이름을 떨치게 한 첫 저작 <강유위 담사동 사상 연구>는 건물 옥상의 컴컴한 골방에서 쓰여졌다. 이 때문에 문화혁명 때는 ‘백전’(전문 분야에만 몰두하고 혁명 사상에는 관심이 없다는 비난)으로 몰렸으며 허난(하남)성으로 하방돼 ‘5.7간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당시 리쩌호우는 몰래 가지고 간 칸트 <순수이성비판> 영문판을 <마오 쩌둥 선집> 밑에 숨겨놓고 보면서 칸트를 연구했다고 한다. 72년에 직장에 복귀한 후, <비판철학 비판 칸트 술평>과 <중국근대사상사론>을 출판하면서 집필 활동을 재개했다.

1988년 전국인민대표대회 문교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으며, 이어 국무원 학위위원회 위원, 중화전국미학학회 부회장, 파리 국제철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80년대 이후에는 미국-싱가포르에 객원교수로 초빙돼 서구 학계에도 얼굴을 알렸다. 리쩌호우는 1989년을 전후해 언론 인터뷰와 학술 발표회에서 공개적으로 정치-경제 개혁과 함께 언론 자유, 법치 실현을 주장했다. 그는 또 학생 운동을 지지하고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지식인 서명 운동에도 적극 앞장섰다. 이 때문에 리쩌호우는 민주주의와 과학이라는 5.4운동 정신을 다시 제기한 1989년 천안문 사건 배후 인물로 지목돼 2년간 가택연금 당했다. 이 기간 동안 ‘부르주아 지식 분자’로 몰려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고 학술활동도 금지됐다. 결국 그는 91년 미국 정부와 학계 압력으로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2004년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 “대약진(大躍進, Great Leap Forward)은 공산 혁명 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근대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마오쩌둥의 주도로 시작된 농공업의 대증산 정책이다. 마오는 《생산성 이론》에 근거해 이 정책을 실시했지만, 농촌의 현실을 무시한 무리한 집단농장화나 농촌에서의 철강생산 등을 진행시킨 결과 2,000만명에서 5,000만명에 이르는 사상 최악의 아사자를 내고 큰 실패로 끝이난다. 이 때문에 마오의 권위는 추락하고 이 권력회복을 목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