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ariat: precarious proletariat
1. 탈숙련화에 반하여, 구상과 실행의 일치를 모색한 브레이버맨의 <노동과 독점자본>은 뷰러웨이의 <생산의 정치>에 의해 논박된다. 후자는 노동과정이 아닌 고용관계에 주목하여, 불가피한 자발적 복무의 동인을 분석한다. 여기에 고든, 에드워즈, 라이크가 공저한 <분절된 노동, 분할된 노동자>는 사회적 축적구조론의 관점에서 단위 생산양식을 규율하는 체제의 변천을 고찰함으로써, 노동통제는 노동과정과 고용관계, 그리고 일개 사업장을 상회하는 축적구조에 의해 다층적으로 구축됨을 논증한다.
2. 구상과 실행을 통합한 ‘싸이버타리아트’가 언제 어디서나 업무에 종사할 수 있는 오늘날, 작금의 노동통제(혹은 HRD/M)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가. 그것은 [서비스업 전면화에 따른 과도한 감정노동에 기인한] 프리케리아트의 자기계발(특히 감정코칭)로 정리할 수 있겠다.
- 신앙 : Norman Vincent Peale, Robert Schuller, Joel Osteen “긍정의 힘”
- 이성 : Martin Saligman “긍정심리학”
- 성공 : Rhonda Byrne “시크릿”
3. 비판은 쉬우나 대안이 어렵다. 예컨대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따위의 글들이 그렇다. 일개 소시민의 생존대응을 진보의 얼굴로 폄하할 수 있는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장애물을 만나면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장애물을 변하게 하든지, 아니면 우리 자신이 변화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우리를 위해 그들 자신을 절대로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가 불만족스럽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화한다면 행동이 달라질 것이고, 행동이 달라지면 그에 대한 세상의 반응도 달라질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람은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 정말 기막힌 발상이다. 영문도 모르고 울다 보면 왠지 슬퍼지고 슬퍼지면 더 심하게 우는 것처럼 신체의 말초적 반응이 감정을 유도한다는 그의 이론을 ‘정서의 말초설(peripheral theory of emotion)’이라고 한다. …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면 만사가 못마땅해 보이고 억지로라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표정에 따라 감정상태가 달라진다는 심리학 이론을 안면 피드백 이론(facial feedback theory)이라고 한다.”(이민규, 2008: 8, 125~128)
4. “하루에 30분도 기도하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 뿐이다.” “그게 제가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의 결론입니다.”(지승호/김규항, 2010: 214~215) 대증요법을 초월한 영적 실재성을 과시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관건이다.
5. “우리 신앙의 문제는,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을 정도로만 회개하려 할 뿐,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경험하게 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회개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개는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특별히 내 생각의 방식과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한 전환을 말한다. 즉, 예수님의 관점이 내 안에 들어와 작동하지 않는 것은 마땅히 회개해야 할 핵심 사안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베드로가 스스로 노력해서 믿음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베드로의 노력만으로는 파도와 물결에 대해 그리고 죽음의 위협에 대해 그 자신의 시각을 바꿀 수 없었다. 자신의 믿음을 아무리 쥐어짜내어 믿는다고 고백하고, 자신이 물 위를 걷는 상상을 아무리 해봐도, 그것이 그가 실제로 물 위를 걷게 하는 믿음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오늘날 크리스천들에게 믿음이란 ‘바라는 대상에 대한 열망’이라고 인식되어 있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해 열심을 가지고 떼를 쓰며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 믿음 있는 행위로 이해되어 왔다. 특별히 한국의 신(神) 개념에는 그런 요소가 많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가 정성을 다해 빌고 구하면 하늘이 감동하여 우리가 원하는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이다. 즉, 우리가 받고 받지 못하는 문제가 우리의 노력과 정성 여하에 달려 있다는 신념이다. 그러나 이런 개념의 믿음은 예수님이 의미하시는 믿음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보게 된다. 상상과 생각을 전환하려는 노력, 인간적인 열심을 가지고 신념을 다지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전혀 다르다. 더 나아가 현대 교회는 현대 심리학의 영향 아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믿음’과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믿음과는 별개이다. 긍정적인 사고가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하나님의 개입을 반드시 전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주장은 개개인 안에 적극적이고 밝게 사고하는 경향성이 있느냐를 문제의 관건으로 본다. ‘나 자신’이 주체가 된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다. 믿음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가 쥐어짜고 노력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이용규, 2010: 127~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