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되면 예술가는 가출을 감행해야 하는데, 물론 그가 떠나는 집이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일가를 이루었다’는 말은 대가들에게나 쓰는 말이지만, 젊은 예술가라고 해서 자신이 지은 집이 갑갑하게 느껴지는 때가 왜 없겠는가. 최근에 신용목은 신용목을 떠났다. 지난 두 권의 시집을 질적으로 이끌었던 작품들, 예컨대 <갈대 등본>이나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같은 시와 함께 이 시인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은 이번 시집을 읽고 이제 그가 더 이상 그 집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의 가출은 내용과 형식 두 측면에서 동시에 진행된 것 같다. ‘내용’에 대해서 일단 간단히 말해두자면, 그는 그의 ‘고향’을 떠났다. 그는 이제 파리에서 몇 년을 보낸 뒤 이윽고 다음과 같은 말을 중얼거리게 된 릴케의 말테Malte처럼 보인다. “그래,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여기로 오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죽겠다는 거 같은데”(말테의 수기). 지난 시집들에서 농경문화의 서럽고 아름다운 퇴적층들을 탐사했던 이가 이번 시집에서는 ‘살기 위해 도착해서는 오히려 죽어가는 곳’인 도시의 자서전을 적는 데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형식’에 관해서는 조금 더 길게 말하자. 그는 그의 ‘노래’도 떠났다. 이번 시집의 시들 중에서 단숨에 읽히는 것은 거의 없다. 단숨에 읽힌다는 것 자체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문제는 다시 읽게 만드느냐 아니냐에 있으니까. 단숨에 읽혀도 되풀이 읽게 만드는 시라면 나쁜 시가 아닐 것이고, 힘들게 다 읽어도 첫줄로 되돌아가게 만들지 않는 시라면 좋은 시가 아닐 것이다. 신용목의 시는 힘들여 읽게 하고 다시 읽게 만든다. 어떤 경우에 이렇게 되는가. 핵심은 난해함 그 자체가 아니라 난해함의 구조가 논리적인가 아닌가에 있는데, 우리는 어떤 난해함 앞에서 이것이 통제되지 않은 미숙함의 흔적인지 명석한 논리의 산물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_ 신형철, 적국에서 보낸 한 철, <아무 날의 도시>, 문학과지성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