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5. 우리의 추체험(追體驗), 즉 ‘미루어 겪어봄’은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8-9. 우르크의 왕 길가메시는 영웅이다. 그는 그리스의 영웅들보다 1,500년 이상을 앞섰다. … 길가메시의 난폭함은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 신들이 창조한 엔키두에 의해 다듬어진다. 둘 사이에는 우정이 생겨난다. 그들은 수많은 모험을 함께하고 우루크를 파괴하려는 여신 이슈타르의 재앙마저도 물리친다. 그러나 신에 대항한 그들에게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린다. 엔키두에게 때 이른 죽음이 닥쳐오고 길가메시는 자신의 품안에서 엔키두의 눈을 감긴다. 이제 영웅은 세속에서 물러나 영생을 얻고자 지혜로운 우트나피시팀을 찾아 나선다. 그와의 만남에서 뜻한 바를 얻지 못한 길가메시는 우여곡절 끝에 불로초를 얻지만 신들은 그것마저 앗아가버린다. 참으로 덧없는 여행이었던 것이다. 고통스러운 세상, 쓸쓸한 인생. 유행가 가사 같은 정조는 이렇게 오랜 옛날부터 인류 곁에 있었다. 후대에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 Gilgamesh Epoch>는 이렇게 말한다. “길가메시여, 그대가 찾는 것은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 신들이 인간을 창조할 때 죽음을 인간의 숙명으로 안겨주고 영생의 삶을 거두었기 때문이오. 즐겁고 충만하게 보내오. 그대의 손을 잡는 어린아이를 사랑하오. 그대의 아내를 품에 안고 즐겁게 해주오. 기껏해야 이런 것들만이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오.”

11.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탐욕이다. 공포는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고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요, 탐욕은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즐거움에 의해 생겨난다. 모세 5경의 야훼틑 인간이 공포로 움직이는 존재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모세 5경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들에게는 공포가 내재화되어, 그렇지 않은 상황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전도된 심리 상태에 처해 있다.

13-15. 이집트가 도달한 형식주의는 피라미드의 벽화 등에서 볼 수 있는 그림에 적용된, ‘정면성의 원리’를 통해 표현된다. 사람의 눈은 정면에서 본 모습이거, 발은 옆모습인데, 이게 한 그림 안에 그려져 있다. … 이는 하나의 공간에서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더 본질적인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이다. (중략) 이집트인들은 안정되다 못해 지루할 정도의 생활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에게 불멸과 영원의 관념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이 응축되어 나타난 것이 <사자의 서>인 것이다. 이것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 환생을 하려면 여러 단계를 거치는데 그 중 하나가 ‘영혼의 무게 재기’이다. 저울의 한쪽 접시에는 죽은 사람의 심장을 놓고, 다른 쪽 접시에는 정의와 진실을 상징하는 마트(정의, 진리, 율법의 여신)의 깃털을 놓는다. 이 무게 재기의 심판관은 지혜의 신 토트이다. 접시가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죽은 이의 영혼은 ‘위대한 파괴자’라는 괴물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다.

18-20. 이 서사시는 오늘날의 모든 것을 몽땅 무시하고,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고 피가 튀는 날 것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다놓는 것이다. 싸움의 발단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미케네 왕 메넬라오스의 집을 방문했다가 메네라오스의 아내 헬레네와 눈이 맞아 함께 도망간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의 형 아가멤논은 미케네의 연합군을 구성하여 트로이 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9년이 넘게 전쟁이 계속되면서 최초의 원인은 잊혀지고 전쟁을 위한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 이른다. … 우리는 ‘일리움’ - ‘일리아스’는 ‘트로이 혹은 일리움에 관한 시’라는 뜻이다 - 이라는 도시를 둘러싼 컨텍스트에 눈을 돌려봐야 한다. <일리아스>가 묘사하는 트로이 전쟁은 사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성립해 있던 두 개의 큰 세력인 미케네 제국과 히타이트 제국 사시에 오랫동안 벌어졌던 여러 싸움들을 집약해놓은 것이다. 기원전 14~13세기에 에게 해의 작은 섬들의 연방인 미케네 제국과 메소피타미아 지역의 히타이트 제국은 모두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들 제국은 이집트와는 달리 상업문명을 이룩했다. 이들이 상업문명을 구축한 것은 이들이 상업에 타고난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사는 땅에 씨를 뿌리고 곡식을 경작해서는 먹고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장사에 나선 것이다. 장사는 더러 약탈을 수반한다. 두 개의 제국 모두 약탈을 겸하는 상업문명이라는 것, 두 제국 모두 전성기에 이르렀다는 것, 이것들로부터 필연적으로 전쟁이 도출되어 나온다. (중략) 트로이는 에게 해 북부의 가장 강력한 요새이자 육상과 해상의 무역로를 지배하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수세대에 걸쳐 왕실의 보물을 축적한 도시였다.

21-22. 그들의 행위는 그리스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집약이다. 그들은 선악이 아닌 명예와 불명예로 움직인다. … 그리스 아테네에서 ‘덕(arete)’은 선한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것을 잘하는 탁월한 능력이었다. 영웅은 자신의 잔인한 행위로써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편안함을 준다. 그것은 두고두고 칭송된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 역시 죽을 운명에 처해 있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운명임을 아는 영웅은 더욱더 명예에 집착한다. 죽어야 하는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불멸성은 명예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영웅 아킬레우스의 탄식은 너무도 절절하다. “아, 어머니시여, 제가 요절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천상의 신이신 올림포스이 제우스에게서 명예를 얻기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찌 털끝만한 명예도 베풀지 않나이까?”

23. 히브리 민족의 극단적 사건 중 하나는 역사가 요세푸스 플리비우스가 기록한 <유대 전쟁사 Bellum Judaicum>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로마의 통치에 저항한 히브리 민족은 기원후 66년 여름에 봉기하여 73년 봄에 ‘마사다 옥쇄’로 끝나는 전쟁을 치렀다. 이때 히브리 광신자들은 모두가 괴멸되었다.

24-25. 그리스의 비극들은 철저하게 자신을 찾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다. 이미 이러한 자기 찾기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 Odysseia>에서 서술된 바 있다. ‘말썽을 일으키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사나이는 트로인 전쟁이 끝났는데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끊임없이 방랑을 한다. 그렇게 여행을 하지 않으면 자기가 누군인지 알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의 여행은 아주 오래전 길가메시가 거쳤던 방랑과도 흡사하며, 훗날 오디세우스의 여행을 본떠서 만들어진, 제목도 똑같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 Ulysses>와도 닮았다.

27-28. 관객은 갈등한다. 둘 다 옳기 때문이다. 옳은 것과 옳은 것의 과격한 대립은 관객을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간다. (중략) 그들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싸움을 보면서 전자가 지키려 하는 전통적 혈연 공동체와 후가자가 강요하려고 하는 새로운 시민적 결사체 사이에 대립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 물음은 오늘날까지도 완벽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 비극은 고전이다.

31. 이 대화편은 플라톤 전집의 약 18%를 차지할 정도로 방대하다. 그런 까닭에 단순한 정치학 저술에 담길 만한 내용뿐만이 아니라, 플라톤의 전 관심사와 학적인 탐구가 종합적으로 담겨 있어서, 그의 중심 저작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31-32. 아테네 폴리스의 몰락은,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문명이 그러하듯이, 그리스 주변 환경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 지역의 연간 강수량은 500mm 정도인데, 이는 자급자족을 위한 농사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염소나 양을 길렀고, 이것은 이 지역의 삼림 파괴를 초래했다. 일단 삼림이 황폐해지면 그것은 치명적이고도 돌이킬 수 없는 위협이 된다. 삼림의 황폐는 농지의 황폐로 이어지고, 농지의 황폐는 아테네 시민의 근간이자 군사력의 중추를 이루는 중무장 보병의 몰락을 가져온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기인 기원전 400년에서 300년은 바로 이때에 해당하며, 그보다 나중인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오면 아테네 농민은 완전히 몰락해서 곡물을 수입할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렇게 본다면 플라톤은 아테네 폴리스의 대격동기를 살았음을 알 수 있고, 그에 따라 이 대화편은 혼란스러운 시기에 등장한 ‘충성스러운’ 책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33. 피타고라스의 교단은 그 자체가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를 가졌으면서도 신비한 것을 배척하였다. 피타고라스 교단은 남성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에게는 극단적인 금욕과 사고의 순수성이 요구되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실제 생활에서도 이른바 ‘매개’ 기능을 갖는, 즉 두 세계에 걸쳐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철저하게 배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콩을 먹지 말라는 지침이었다. 콩은 모든 신화적 사유체계 속에서 모호한 것으로 나타나며, 그런 까닭에 피타고라스는 콩을 악마적인 것으로 여겼다.

33-34.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주의가 용납되기 어려운 혼란한 상황을 살면서도 오히려 그 순수주의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현실 거역의 철학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론>은 그 거역의 집대성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저작이 가진 미묘한 자기 모순을 짐작할 수 있다.

37. ‘그 그릇과 네트워크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운용할 것인가’ … 이렇게 본다면 ‘매체’는 텍스트의 생산과 유통을 둘러싼 거대한 컨텍스트를 가리키는 말로 다시 규정될 수 있다.

38. 이집트 사람들은 갈대에 글을 썼다. 파피루스는 나일 강 삼각주 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식물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이것을 가공하여 3.5-4.5m 또는 7-8m 길이의 두루마리 파피루스를 만들어 썼다. 그런데 이 파피루스는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집트 정부가 그것의 제조를 독점해서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파피루스에 이집트 상형문자를 그리는 일은 상당한 기술과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42-43. 과연 로마는 그 말의 모든 의미에 있어서 실용적이다. 로마인들에게는 사변적으로 논의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에 앞선 세계에서 그런 문제들을 남김없이 제기했고, 나름대로 답변을 시도했다. 나아가 그 답변의 방식, 즉 지적 탐구의 방법론까지도 설정해놓았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다만 이러한 바탕 위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사람의 일에만 자신들의 힘을 투여하면서,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휘둘리지 않고 제국 건설이라는 아주 단순한 실천의 길로 걸어갔던 것이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의 지적인 문제들이 로마에서는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은 채, 단지 호사가들의 담화를 장식하는데 그쳤고, 중세에 이르러서 도식적으로 간헐적으로 솟아나다가, 르네상스에 와서야 비로소 재생되었다고 한다면 로마 시대는 철저한 비사변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처럼 소극적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선행하는 시대의 사변을 삶 속에 온전히 실현해버린, 진정으로 행복한 시대라는 적극적 규정을 내리는 것이 보다 타당해 보인다. 로마적 세계가 실용적이라 함은 달리 말해서 합리성의 극단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기서 ‘합리성’을 가치가 포함된 것이나, 독일의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사변적 합리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성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ratio’의 본래의 뜻, 즉 ‘계산’으로 파악해야 한다. 로마는 이성적이었으므로 계산이 분명한 사회였다.

43-45. 형식 논리학은 ‘어떤 것은 어떤 것’이고 ‘어떤 것은 어떤 것이 아닌 것이 아니다’라는, 이른바 동일률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삼는다. 이것은 형식 논리학의 근본 원칙인 모두스 뽀넨스(modus ponens)이다. 따라서 모두스 뽀넨스 - 여기서 모두스는 우선 ‘방법’이란 의미를 갖는다 - 는 어떤 것에 속하는 것의 범위를 확정하고, 그것에 속하지 않는 것이 그것과 같지 않다는, 방정식에서 등호를 가운데 두고 좌우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이다. 이는 수학에 적용되고 고대인들의 일상적 대화에서 사용되어 모든 판단의 궁극적 기준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모두스 뽀넨스가 현실의 세계에 적용될 때, 그것은 인간세계의 계약으로서 성립한다. 로마는 철저한 계약의 세계이기도 했는데 우리는 이 점을, 그 세계의 근본 성격을 함축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건국신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다가 양치기에게 발견된 군신(軍神) 마르스의 아들들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세력이 어느 정도 커졌을 때 로마를 분할 통치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자리를 잡았고,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런데 얼마 싸움이 벌어진다. 로물루스가 세력의 ‘경계’ - 이것이 모두스의 두 번째 의미이다 - 를 나타내기 위해 팔라티누스 언덕과 아벤티누스 언덕 사이에 파 두었던 도랑을 레무스가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로물루스는 모두스를 무시한 레무스를 죽였고, 팔라티누스 언덕 주변에 성벽을 쌓아 그것을 도시(civitas)로 만들었다. … 전설의 핵심은 로물루스라는 인간과 레무스라는 인간이 사이의 모두스에 있다. 신의 법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들은 ‘신의 법을 따를 것이냐, 인간의 법을 준수할 것이냐’를 가지고 고민하지 않는다. 단호하게 인간 사이에 모두스를 정하고 - 이것이 이른바 ‘사회계약’이다 -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는 형제라 해도 죽이는 것이다. 인간의 법을 지키지 않은 자라면 형제라 해도 죽인다는 것, 신의 법을 따른다면 형제는 죽일 수 없는데도 인간의 법에 따라 죽인다는 것, 이것이 로마적 실용성의 사회적 단면인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다. 로마를 보는 우리는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옳음과 옳음의 대립과 같은 상황 때문에 마음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45. 로마는 선행하는 시대의 모든 고민을 해소하고 인간의 모두스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레무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이르기까지는 그 모두스를 뛰어넘은 자가 아무도 없었다. 공화정 말기 갈리아에서 전쟁을 치르던 카이사르는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에 맞서 싸우기 위해 로마로 되돌아온다. 그는 루비콘 강 앞에서 망설인다. ‘원로원 최종 권고’를 따르지 않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 그는 역적이 된다. 그러나 결국 그는 루비콘 강을 건너기로 결심한다. 모두스를 파괴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모두스에 걸려 죽느냐, 아니면 자신이 새로운 모두스를 만드느냐뿐이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세계가 비팜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시위는 던져졌다.”

46-47. 그 자신 영욕의 삶을 살았던 게오르크 루카치는 “분열은 철학의 필요의 원천”이라는 헤겔의 말을 진전시켜 “삶의 형식으로서뿐만 아니라 문학의 형식을 규정하고, 또 그 내용을 부여하는 것으로서의 철학이란, 언제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균열을 말해주는 하나의 징후이며, 또 자아와 세계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고 영혼과 행위가 서로 일치하지 않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표지”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그리스 시대가 그러한 분열이 없던 행복한 시대라 진단하나, 엄밀하게 말하며 그는 착각한 것이다. 고전 시대의 진정한 행복은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성이 여전히 꿈틀거리던 그리스가 아니라 로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52-53. 로마라는 국가는 고대사회에서 가장 완벽한 제도를 갖춘 불명성 보장체제였다. 고대라는 시대적 제약이 있기는 하나, 그 국가는 어느 정도 자격만 갖추면 거의 모든 이에게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시민의 자격을 주었다. 로마의 시민권 정책은 로마가 보편 제국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면서, 로마라는 경계선 안에 들어 있는 인간들에게 로마의 이름으로 불멸성을 보장해주겠다는 징표이기도 했다. 루비콘이라는 모두스를 뛰어넘은 카이사르는 그가 정복한 갈리아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로마가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단초를 마련하기도 했다. … 그것이 더 이상 자신의 무상성을 보상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로마라는 도시 경계선을 벗어나 각자의 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가 언제 국가를 이루고 살았냐는 듯이, 저마다의 섬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53-54. 로마 가도는 오늘날 보아도 대단한 길이다. 일단 길 자체의 정확함이 그러하다. 큰 마름돌을 깐 차도는 4m였고, 좌우에는 3m씩의 인도가 있었다. 합해서 10m에 이른다. 4층으로 이루어진 깊이는 1m가 넘는다. 길의 규모 역시 그러하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500년 동안 건설된 도로의 총 길이는 간선 도로만 해도 8만 km에 달한다.

54-55. 제국 붕괴의 여파로부터 중세가 암흑을 걷어낼 수 있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따뜻한 날씨였다. 기후학자들은 기원후 800년부터 1200년경까지를 ‘중세 온난기’라 부른다. 이 기간은 지구가 8천 년 만에 처음 맞는 가장 따스한 시기였다.

56-58. 그가 살아간 시대는 중세의 풍요가 넘치고 그리스의 철학이 유럽으로 들어와 활발하게 연구된 다음이었다. 그러므로 중세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당시에 재발견된 플라톤철학, 아리스토텔레스철학, 헬레니즘, 아랍철학 및 이교사상 등을 기독교 중심으로 종합하고 재정리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바로 이러한 과제를 수행해낸 결과물인 것이다. 그의 사상은 어설픈 절충이 아니라, 기존의 모든 것을 분석하고 소화해낸 새로운 종합이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를 바탕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수용하되, 둘을 체계적으로 조화시킨 것이다. (중략)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으로 집대성된 스콜라철학은 이교적 도전에 대한 기독교의 체계적 응전이었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나 이제는 오히려 새로운 학문들을 제약하는 질곡으로서 작용한다.

57. 대략 12세기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이 지식인들은 그리스어로 된 고전을 번역하고나 논리학을 탐구하였다. 이들은 다른 도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이 직업인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글을 쓰고 가르쳐야 하는 자신의 과제를 의식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도시의 일터에서 장인이나 상인들과 함께 현실 세계를 살아가면서, 나중에는 자신들의 조합을 바탕으로 대학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학이 발전하여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에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모여들고,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로저 베이컨, 보나벤투라 등에서 절정에 이른 것이다.

72. 베이컨의 <신기관>은 제목을 보아도 확연히 알 수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했던 학문의 기초적 방법론인 ‘오르가논(Organon)’을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확립하려는 목적을 가진 저작이다. 이 책의 제1부는 ‘우상파괴 편’으로 편견을 논박하고 자신의 고유한 학문방법론인 귀납법의 개요를 드러낸다고 하는 소극적인 측면을, 제2부는 ‘진리건설 편’으로 참된 귀납법의 예를 보여주려는 적극적, 실용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73. 영국은 근대에 들어서는 길목에서 극심한 내전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귀족계급이 해체되고 경제적 이익을 전면에 내세우는 국가로 탈바꿈한다. 한마디로 현실 속에서의 단순한 실천을 국가의 원리로 삼게 된 것이다.

75. 홉스는 베이컨의 <신기관>이 제시한 방법론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척하고 갈릴레오의 영향을 받아, 인간을 자기 보존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운동하는 존재로 파악하였다.

75-76. 사람들은 너무 솔직한 것에 진저리를 내고 속으로는 그것의 참됨을 인정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온건한 태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로크는 똑같이 자본주의체제의 옹호자이면서도 홉스보다는 널리 받아들여졌고, 그런 점에서 그는 감미롭지만 차가운 사람이다. 사실상 로크는 <정부에 관한 두 개의 논문>을 저술함으로써 현대 서구사회의 주류가 되는 정치경제 체제의 정당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간주되는데, 특히 인간의 노동과 노동의 산물을 재규정함으로써 사유재산을 확실하게 정당화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로크는 인간의 신체가 각자의 것이라는 데서 출발하여, 노동의 산물, 더 나아가 자신의 노동뿐만 아니라 하인의 노동, 함께 일한 자들의 노동의 산물까지도 개인의 자산이 된다는 논의를 전개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재산을 취득할 수 있는 권리에 ‘자연권’이라 이름 붙임으로써 이론적인 정당화를 완성한다. 이 과정은 바로 무제한적인 자본주의적 점유를 방해하던 도덕적 제약을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어서 재산에 근거한 계급적 차별까지도 정당화하게 되고, 그러한 차별을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적 기반으로까지 삼게 한다. 이로써 우리는 베이컨에서는 단순히 학문의 방법론 차원에서 제기되던 감각 경험 중시가 홉스에서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초보적인 이론으로 전개되고, 로크에 와서는 완전한 이론 체계로 세워지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78-80. 18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자급자족형 농업에 매달리고 있던 프랑스 농민들은 기근과 질병, 전쟁으로 인한 굶주림의 공포 속에서 살아갔다. 태양왕 루이 14세 치하에서도 프랑스 인구의 1/10이 1693~1694년의 기근과 이에 따라 일어난 전염병으로 죽었던 것이다. 그런 공포 속에서 빈발했던 빵 폭동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농업 생산의 불안은 100년이 넘도록 계속되어 18세기에 이르면 프랑스는 토지 부족, 인구 증가, 흉작 대처 능력의 취약성, 급작스런 기후 변화 등과 같은 온갖 악조건을 겹쳐서 겪게 되고, 이로 인해 시골 지역까지 불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불온한 분위기는 프랑스 혁명 때 분노로 바뀌어 화려하기 그지없는 낭비가이며 경솔한 왕비 앙투아네트를 향해 세찬 파도처럼 밀려갔다. 왜 지페가치가 나날이 떨어지는지, 왜 빵값이 나날이 올라가는지, 왜 세금이 나날이 많아지는지, 원인은 분명해 보였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그러나 이는 군중의 착각이었다. 앞서 미리 밝혔듯이 프랑스 농민의 굶주림은 앙투아네트의 낭비 때문이 아니라, 기근과 흉작, 더 근본적으로는 기후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 프랑스 지배층에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구조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왜 프랑스 농민들은 모든 사태의 원인이 왕비에게 있다고 믿은 걸까? 혹시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기 전에 왕비에 대한 나쁜 소문을 들었던 것은 아닐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프랑스 혁명기에 절정에 이르렀던 정치적 포르노그래피를 살펴보아야 한다.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포르노그래피는 오늘날의 외설 음란물과는 달리 교회와 국가의 권위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서 일종의 정치적 문헌이었다. 정치적 포르노그래피는 유물론에 근본을 두었고, 성직자, 귀족, 수녀들에 대한 경멸적 비판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포르노그래피는 프랑스 혁명기 동안 맹렬하게 증가하였고, 독자층은 점차 대중으로까지 넓어졌다. 정치적 포르노그래피 작가 중에는 미라보와 생쥐스트 같은 주도적 혁명가도 있었다. 이처럼 정치적 동기를 지니고 있던 포르노그래피는 ‘앙시앙 레짐(구체제)’으로 상징되는 전통적 사회, 정치체제의 정통성을 침해함으로써 혁명을 야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 이들 포르노그래피 중에서 앙투아네트와 연관된 것은 무엇인가? 포르노그래피는 많이 있었으나 사실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읽히고 파문을 불러일으킨 것은 마리 앙투와네트에 대한 것, 특히 그 자녀들의 친부가 의심스럽다는 내용이었다. 앙투아네트가 노골적으로 음란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취한 오스트리아 여인>에서 왕비는 국왕의 동생인 다르투아 백작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녀가 총애하는 폴리냑 공작부인과는 동성애 관계에 있다. 이러한 설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국왕 루이 16세가 성불구라는 것이며, 이 작품은 이러한 비방을 통해서 왕권에 치명타를 가하려고 하는 것이다. “모두들 소곤거린다네. 국왕께서 될는지 안 될는지. 슬픈 왕비는 체념하는데.” 이 구절을 보면 분명 국왕은 임포텐스고 왕비는 음녀다. 수많은 정치적 포르노그래피가 나돌았지만 앙투아네트에 관한 것은 이처럼 압도적으로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흑색선전을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방하는 팸플릿을 만드는 일이 가장 두둑한 이윤이 남는 사업이었고, 그에 따라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대중들에게 악의 화신으로 각인된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서 빵을 달라던 대중들이 왜 앙투아네트를 겨냥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80. 정치적 포르노그래피가 프랑스 혁명기의 대중적 문서였다면 <백과전서>는 원리적인 문헌이었다. 1772년에 완간된 <백과전서>는 근대 계몽주의의 완성을 상징함과 동시에 지식 세계를 새롭게 구조화하려는 전략의 실현이기도 하다. <백과전서>는 직접적으로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혁신을 이어받아 중세 스콜라철학을 완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전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전복으로 통하여 현실 세계에서의 권력까지도 뒤엎으려고 한다.

80-81. 지식뿐만 아니라 현상을 분류하는 방식은 원칙상 임의적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든 제멋대로 현상을 구분할 수 있으나 이것이 널리 통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권력자는 권력을 통해 정당화하거나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임의적 구분을 통용시킬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면 사물과 지식은 분류 도표로 확립되어 질서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백과전서파는 지식 분류가 가진 이러한 권력구조를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통적 질서를 해체하는 전략으로 새로운 지식 분류를 채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백과전서> 편집 작업에 착수했다. … <백과전서>는 베이컨과 체임버스가 제시한 ‘지식의 나무’를 검토한 뒤, 자신들만의 그것을 제시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신성하다고 주장하던 것들을 학문의 세계에서 배제시켜 버림으로써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려 했다. 그들이 신성한 것을 배제할 때 사용한 원리는 감각적 인식만이 우리에게 사실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경험론의 주장이었다. 그에 따라 경험으로 인식할 수 없는 신에 대해 다루는 신학은 미신의 위치로 떨어지고 예술과 과학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82-83. 아담 스미스의 생몰연대(1723~1790)를 염두에 둔다면, 그가 여전히 의미 있게 인용되는 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이다. 생전에 그는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윤리학 교수였을 뿐이다. … 스미스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지점은 그가 학술적인 글이 아닌 잡지의 시사칼럼에서, 일상의 대화에서 인용된다는 것이다. (중략) 아담 스미스의 이러한 행복은 그의 저작 <국부론> 때문이다. 이 책은 초판이 6개월 만에 매진될 정도로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대영제국의 총리실에까지 그의 명성이 알려졌다는 사실 하나만 보아도 이러한 성공의 범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성공에 힘입어 그는 구체적인 정책 결정에 관여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는데, 총리를 지낸 프레드릭 노스는 국가 예산안을 짜는 데 그가 추천한 새로운 조세제도를 도입했는가 하면, 1778년 아메리카 식민지 정책 결정, 1779년 아일랜드와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등에서도 그는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84-86.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주면,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러한 모든 제의가 의미하는 바다. …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이야기한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많은 경우와 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목적을 증진시키게 된다.” 여기서 개인의 이익 추구와 보편적인 사회의 이익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87. ‘국부’가 아닌 개인의 ‘치부’를 목적으로 삼은 행위를 정당화할 때에도 스미스가 활용된다. 이는 이기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삶을 살았던 스미스 자신에게는 언짢은 일이겠으나, 그의 위세를 빌려 자신의 이기심만을 충족시키며 행복한 나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겠다.

87-88. 1843년 말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칼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첫머리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라는 말이 나온다. … 프란시스 베이컨의 비서 출신인 토마스 홉스는 이미 1651년에 출간된 <리바이어던>에서 종교에 대한 비판을 마무리지었고, 그 이후 대영제국은 세속 국가로의 길을 착실히 걸어, 아담 스미스에 이르면 타산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는 인간들이 자기도 모르게 쌓아올리는 국가의 부를 논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좀 더디기는 했으나 프랑스에서는 1772년 <백과전서>가 발간되면서 신학을 미신과 같은 차원에 놓아두었고, 종교적 정당화인 왕권신수설에 근거하여 유지되던 구체제가 혁명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 이들 나라에서 종교 비판은 더 이상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종교 비판을 거론한 마르크스의 언급은 후진적 독일에서 종교 비판이 그만큼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독일은 그랬다. 다른 나라들은 현실과 텍스트가 서로 긴밀하게 대화하고 있었는데도 독일은 종교 비판이라는 우회로를 거쳐 갈 수밖에 없을 만큼 현실이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영제국 사람들이 손에 쥐고 이리저리 만져보며 확인하던 현실은 독일에서는 수많은 중간 단계를 거치고 또 거친 후에야 인간에게 다가왔다. 그것도 곧바로 현실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한 형태로 성립할 뿐이었다. 현실은 현실이되 정신에 의해 매개된 현실이므로 정신적인 것이었으며, ‘날 것의 현실’은 어디에도 없었다. 칸트가 확실하게 제거해버린 형이상학이, 칸트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후학들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되어 고도의 사변으로 전개된 까닭도 이러한 현실 결여에 있었다.

89-90. 질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양으로 간주하여 계산해버리는 ‘산수적’ 현실 대책과, 인간을 욕구 충족을 향해가는 이기심 덩어리로 파악하는 시각이 그들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데, 헤겔은 2세기에 유행하던 신비주의를 되살린다. 그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무시하고 결과가 원인이라는 시대착오적 순환논리를 변증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제시한다. 어떤 이들은 경건함으로 도피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인간의 열정과 천재성에 호소하기도 한다. 이것들 모두 한마디로 달뜬 낭만주의이다. 이처럼 후진적인 독일과는 달리 일찌감치 세상사를 알아차린 대영제국에서는 현실 법칙을 철저하게 밀고 나가, 드디어 인간과 그 인간들이 이루어내는 사회에 대한 완벽한 재정의에 이른다. 1859년 출간된 <종의 기원>이 바로 그것이다.

90-91. 다윈 이전에 이미 여러 학자들은 지질학이나 기타 여러 탐구를 통해서 종의 진화에 관한 기본적인 근거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모든 증거들을 하나로 꿸 수 있는 설명틀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반면 다윈은 그것들을 통합하여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했던 것이다. 다윈은 이러한 설명을 통하여 우선 세계 안에는 아무런 목적도 있을 수 없음을 드러내 보였고, 인간 역시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진화했음을 천명하였다. 자연계와 사회세계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인간은 세계에 우뚝 선 존재가 아니라, 그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목적이 진보라 해도 과정은 끊임없는 투쟁일 수밖에 없다. 자원을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끼리 피 흘리며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로 간주된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인간 본성과 자연 환경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로 설명된다. 이로써 무한경쟁에 근거를 둔 근대의 자본주의 세계는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등장한 사회주의에서도 ‘투쟁’이라고 하는 방법론을 받아들였다. 인간은 더 이상 도덕의 겉옷을 걸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가 자본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맨몸으로 살갗을 찢어 가며 쓰라린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이 기반 위에서 어떠한 처방도 한낱 도덕주의적 대증요법밖에 되지 못한다.

92. 20세기는 어느 역사학자의 말처럼 ‘극단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극단은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다. 15세기 이래 면면히 준비되어온 것들이 표피를 뚫고 터져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