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과 의식화는 ‘수술 중 각성’과 같은 것. 주체는 바깥과 내면 사이에 있다.
“당신의 적대자들을 건드리지 말라. 그들을 적수로, 다시 말해 대등한 존재로 만들지 말라! 적의 큰 승리는 당신에 대해 그가 하는 말을 당신이 믿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적의 수는 우리의 중요도가 커지는 데 비례해서 늘어난다.”(폴 발레리)
“능력주의를 믿기 때문에 사람들이 경쟁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과 구직자 앞에 놓인 ‘구조적 경쟁’이 능력주의를 강제하는 것이다. 능력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지만 본질적으로 기업은 생존과 성장을 위해 능력 있는 사원을 모집·채용한다. 이를 도외시하면 기업 경쟁력을 잃게 된다. 미디어오늘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재를 기자로 채용하려고 하지 않나? 대학이나 국가 역시 능력주의를 요구한다. 우리가 분석할 대상은 능력주의가 아니라 능력주의를 강제하는 구조적 경쟁이다. 경쟁을 더 엄밀하게 분석해야 한다.”(이범)
‘능력’과 ‘능력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지와 인과관계에 대한 오인. 능력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확인한다.
“구조적 경쟁이 능력주의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가 구조적 차별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걸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어떻게든 본인이 인식론적 우위에 있음을 뽐내고 싶은 마음에 ‘비판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다가 자충수를 둔 것일까.
학생부종합전형(이하 학종)의 임종은 기묘하다. 그 부고(訃告)가 임종에 앞서 정부에 의해 회람되었기 때문이다. ‘고교교육 기여대학 지원사업’의 매서운 부정. 어미가 자식을 죽인 학종의 부고에는 ‘공정성’이 시퍼렇게 새겨져 있고, 공정성은 ‘불신’을 대변한다.
“깜깜이 전형, 금수저 전형”으로 환언되는 불신. “깜깜이 전형”은 대학을, “금수저 전형”은 고교를 겨눈다. 고교와 대학을 향한 불신은 어떻게 점화되어 학종을 불태웠을까.
불신은 먼저 기득권의 불만에서 피어 올랐다. 수능 대비 ‘자녀의 몫’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학종. 수능 모집인원을 확대하면 합격자의 특구 쏠림은 자명함에도, 능력주의를 유감 없이 향유하지 못한 기득권의 불만은 점차 증오로 자라났다.
그렇다. 불신을 조장한 근원은 다름 아닌 기득권의 증오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보수언론의 논조가 한겨레 따위의 자칭 진보언론에까지 번진 걸까.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IMF 이후 20여 년 간 운동장은 가파르게 기울어졌다. 학종이 ‘가파른 운동장의 평형’에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태에 무지한 (혹은 선동에 동요된) 자칭 진보언론은 앞뒤 맥락 없이 대입을 상회하는 운동장의 기울기를 질타하였다. 타당한 대응은 이내 소실되고 편향은 거세져 갔다. “깜깜이”는 중의적인 조어였던 셈이다. 이것은 대학을 향한 비난이자 사회를 덮은 맹목이었다.
둘째, 학종은 “교사의 도움 없이 좋은 학생을 선발할 수 없”음을 천명하고 교사의 권위를 세워 학교교육을 돕는 전형이(었)다. 그러나 적잖은 교사가 맹목에 휩쓸려 학종을 오해하였고, 편의에 따라 ‘추천서’를 하찮게 여겼으며 때로는 ‘학생부’ 기록을 어딘가에 양도하였다. 게다가 수능이 불특정 다수와 경쟁하게 했다면, 학종은 특정 소수를 의식케 하였다. 모든 아이가 우리 모두의 아이는 아니었다. “금수저”는 민낯이었기에 분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렇게 학종은 임종을 앞두고 있다. 학종의 공백을 점하고자 여러 세력이 ‘정책연구’란 명목으로 각축을 벌인다. 애석한 일이다. 학종의 종언과 함께, 이제 학생들은 하나 둘씩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설 것이다. 교실의 경계가 흐릿해져 지구가 학교인 시대, 대입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학종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무엇일까.
아, 저, 하얀, 무수한, 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황인숙, “비”,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문학과지성사, 1998
“속물은 진정으로 향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속물이 유일하게 향유할 수 있는 것은 허영심 뿐이다.”(쇼펜하우어)
“이 책은 하나의 중심적 질문을 다룬다.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른 기본권 제한에서의 법익 균형성 판단이, 정당성 없는 기계적 기준에 의존하지도 않으며 체계화할 수 없는 직관에 함몰되지도 않도록 하는, 타당한 심사의 구조는 무엇인가?”(이민열)
The Educationalization of Evaluation
[0] 왜곡의 왜곡으로 이어지는 질곡
“현 정부에서도 대입 기본계획을 바꾸거나 <고교교육 기여대학 지원사업>의 조건으로 요구하거나 코로나19로 인한 비상조치를 취하는 방식으로 수시모집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제거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은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없어지면, 수능은 사실상 재수생을 위한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라는 성격을 갖게 되므로 학교 교육에 미치는 수능의 영향력은 대폭 줄어든다. 그리고 학생은 수능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대학입시는 학교 교육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1] 체계로서의 교육
지역과 계층을 위시한 여러 세력의 이해관계가 물질적으로 응축된 “체계로서의 교육”은 인간의 잠재력 발현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왜일까. 일종의 동어반복이겠으나 “체계로서의 교육”은 가치의 권위적 배분을 매개하는 정치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2] 교육의 본성
체계로서의 교육(이하 “교육”)은 학습을 특정 지점으로 견인하고 추동하는 다중 메커니즘의 합이다. 교육은, 결과로서 과정을 입증하듯 평가에 의거하여 그 과정을 역으로 재구성한다. 일견 교육과정에 기반을 두고 평가가 이루어지는 듯 하나 평가는 교육과정을 언제나 앞서 조율한다. 이점에서 2021학년도 수능은 유의미한 사례임에 틀림 없다. 교육은 수업에서 디자인 되는 것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각인된 상대적 자율성의 일부가 수업에서 용인되는 것이다.
[3] 이데올로기 직면
이데올로기는 왜곡된 바를 자연스럽게 만든다. 작금의 교육은 위계를 전제하는 동시에 제한된 상상력으로 학습의 이상을 동경하도록 독려한다. 이 둘 사이에 대입과 관련된 모든 담론이 함몰된다. 예외는 없다. 마치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말한 것처럼. “파시즘은 대중으로 하여금 결코 권리를 찾게 함으로써가 아니라 표현하게 함으로써 구원을 찾고자 한다.”
[4] 교육의 교육적 전환
사람이 먼저일 수 없는 교육에서 인간의 얼굴을 찾는 일은 무익하다. 한계가 명확하다. 그럼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기존 교육의 ‘비평’에서 새로운 교육 ‘창작’으로 도약해야 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토로하였듯, 비평이란 결국 부정하는 대상에 기생하는 것으로, 적이 사라지면 자신도 소실되고 만다. 수능이 약화 혹은 폐기되면 교육 개혁이 도래하게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비평의 필요로] 또 다른 시험을 발명해야 할 것이다. 정치에 의해 쓰여진 ‘기존의 교육’으로는 평가로 환원되는 뫼비우스적 위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5] 평가의 교육화
그렇다면 새로운 교육을 짓는 일, 벤야민이 말한 ‘정치의 심미화’에서 ‘예술의 정치화’로 가는 교육의 교육적 전환은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정치의 교육(학) 문법이 선발이라면, 교육(학) 본연의 문법은 육성이다. 우리는 ‘교육의 평가화’와 결별하고 ‘평가의 교육화’로 가야 한다. 여기에 구원이 있고, 이것은 나의 이직 사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