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857 × 7 = 999,999
“사사키 아타루는 일본에서도 시골인 아오모리에서 1973년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도쿄대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야전과 영원-푸코·라캉·르장드르>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 그는 논문을 들고 10군데 출판사를 돌아다녔으나, 무명의 저자가 쓴 800여쪽의 학술서를 선뜻 내겠다는 곳은 없었다.”
그는 “이웃 일본만 해도 2, 3년을 주기로 눈에 띌만한 책을 내놓는 신진 학자들이 등장한다”며 “하지만 한국에서는 최근 10여 년간 선배 학자들의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 후배 학자 연구를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교향곡 제7번은 제2차 세계대전인 1941년 레닌그라드전투 당시 작곡되었다.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나치독일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져있었다. 결국 레닌그라드는 이 위기를 극복하고 포위에서 풀려나는데 쇼스타코비치는 이곳에서 교향곡 제7번을 완성한다. 그해 12월 완성된 이 곡은 레닌그라드 시에 헌정되었고 발표되자마자 미국을 포함한 여러 서방국가에서 연주되었다. 전쟁 중 쓰여진 교향곡 제7번, 8번, 9번을 일명 `전쟁 교향곡’이라 부른다. 그중 교향곡 제7번은 표제음악으로 독일의 공격과 이에 저항하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투쟁과 고통, 그리고 최후 승리의 함성을 파노라마처럼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고향인 레닌그라드에 살고 있던 쇼스타코비치는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를 하려고 했지만, 심한 근시와 쇠약한 체력으로 군복무를 거부당했다. 그는 다른 방법으로 국가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며 서둘러 이 곡을 쓰기 시작했다. 당국은 그해 10월 쇼스타코비치 일가를 레닌그라드에서 쿠이비셰프로 피난시켰고, 그곳에서 이 곡은 1941년 12월 완성되어 이듬해 3월 초연되었다. 한편 마이크로필름으로 제작된 이 곡의 악보는 미국으로 보내져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1942년 7월 초연되어 큰 인기를 끌면서 연합군의 사기를 높이는데 일조하게 된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제7번을 통해 나치에 대항해 온 인민이 떨쳐 일어설 것을 촉구했고, 전쟁의 포연 속에서 절반 밖에 남지 않은 볼쇼이관현악단원들을 불러 모아 이 곡을 연주했다.
솔로몬 볼코프가 쓴 쇼스타코비치의 회상록 `증언’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나는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 교향곡’을 빠른 속도로 써내려갔다. 그 곡은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이 전쟁판이었다. 나는 인민들과 함께 있어야 했고 전쟁을 겪는 조국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싶었으며 그걸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전쟁이 터진 첫날부터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작업을 시작했다. 아주 집중해서 작업했다. 나는 우리 시대에 대해, 그리고 적에게 승리했음에도 힘도 생명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우리 동시대인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이 곡을 ‘레닌그라드’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점령된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스탈린이 이미 철저히 파괴했고 히틀러가 마지막 타격을 가한 레닌그라드’를 애도한 곡이다.”
1급 승급. 한국어교원 2급 자격 취득 후 한국어교육 경력이 5년 이상이며, 강의 시수가 2,000시간 이상인 사람
“신사계급을 뜻하는 젠트리(gentry)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 사회학자 루스 글랜스는 1964년 영국 런던을 관찰하며 재밌는 현상을 발견합니다. 빈민가에 중산층이 이주하면 임대료 등이 치솟아 원주민은 외곽으로 밀려나고 지역이 완전히 탈바꿈하는 거죠. 이처럼 슬럼가가 고급주거공간으로 변하는 것을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 역사와 약속에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들국화 2집. 또다시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설레는 마음과 함께
언제나 크리스마스 돌아오면 지난 추억을 생각해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사랑의 느낌과 함께
누구나 크리스마스 돌아오면 따스한 사랑을 찾지
거리에는 캐롤송이 울리고 괜스레 바빠지는 발걸음
이름 모를 골목에선 슬픔도 많지만
어디에나 소리없이 사랑은 내리네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설레는 마음과 함께
언제나 크리스마스 돌아오면 지난 추억을 생각해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91. ‘97년 체제’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신자유주의적 제도의 일반화’라기 보다는 ‘네트워크 위계의 완성’이 그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본다. 자유주의적 제도가 깔린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경쟁에 맞서기 위해 더 강고한 위계 구조를 구축한 것이 97년 체제의 특징인 것이다.
92. 1997~1998년 금융 위기는 기업 내에서 이들의 권력을 극적으로 강화했다.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386세대가 유교적 관료제와 결합한 권위주의에 ‘반체제 운동’으로 저항하며 ‘재야’에서부터 대항권력을 구축한 반면, 기업의 386세대는 1997년 금융 위기로 인해 ‘저절로’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먼저, 1997년 금융 위기의 폭탄은 산업화 세대의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당시 이들(1930년대 후반 ~ 1940년대 후반 출생 세대)은 추풍낙엽처럼 노동시장에서 퇴출했다. 대기업들은 금융 위기를 적체된 인력을 구조 조정하는 기회로 삼았고, 이 세대는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 없이 ‘구조 조정’의 칼날에 몸을 맡겨야 했다. 반면, 30대로 기업 조직의 밑바닥부터 중간 허리를 구성하고 있던 386세대는 이 칼날을 무시 비켜나며 대부분 생존했다. 그런데 이들이 의도하지 않은,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그다음 세대의 ‘전멸’로부터 비롯됐다. 1997년 금융 위기에 닥쳐 기업들은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정규직’ 사원을 채용하지 않는다. 채용하더라도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장기 호황에 입사한 386세대에 비해 훨씬 작은 규모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화된 채 입사한다. 386세대는 졸지에 아래위가 모두 잘려나가면서 기업 조직에 사실상 홀로 남겨진 ‘거대한 세대의 네트워크 블록’이 되어버린 것이다.
107~108. 한 세대가 권력을 독점하면, 그만큼 밀려난 세대가 있기 마련이다. 정치권과 마찬가지로, 희생된 세대는 바로 아랫세대인 40대다. 1960~1964년 출생 세대가 30대 중ㆍ후반(1990년대 후반)에 최초로 임원에 진입(2퍼센트)해 40대 중ㆍ후반(2000년대 후반)에 25퍼센트에 이르며 확실한 주류로 자리매김했고, 1965~1969년 출생 세대가 1퍼센트(2000년대 초반)에서 20퍼센트(2010년대 초반)로 그 뒤를 따랐다. 반면 1970~1974년 출생 세대는 2000년대 후반 0.3퍼센트로 진입해, 10년 후 오늘날 386세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9.4퍼센트를 기록 중이다(성장의 기울기를 비교해보라). 50대가 임원직을 틀어쥐고 놓지 않으니, 40대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적체되어 있는 것이다. 이 데이터의 결과와 1장의 정치권 데이터를 합산하면, 386세대는 근 20년에 걸쳐 한국의 국가와 시장의 수뇌부를 완벽하게 장악했고, 아랫세대의 성장을 억압하며 정치권과 노동시장에서 최고위직을 장기 독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_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