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16, 2019: 6:49 pm: bluemosesErudition

“친구들과 사이가 나쁘거나 협조성이 없는 게 아니라 문득 자연스럽게 혼자가 되는 아이”

: 6:19 pm: bluemosesErudition

5. 한국에서 <타이타닉>이 개봉한 날짜는 1998년 2월 20일이다. 개봉 전부터 반응이 열광적이어서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개봉 열흘 전부터 예매표를 팔았고, 개봉 첫 주말 서울에서만 13만 6천 명의 관객이 몰렸다. 그런데 당시는 IMF 구제금융 사태 직후였고, 전 국가 차원에서 금을 모아 외채를 상황하자는 금 모으기 운동이 진행 중이었다.

7~8. IMF의 구제금융은 IMF가 제시하는 대폭적이고 강력한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했고, 한국의 신자유주의 경제 관료들은 이 ‘곤경’을 80년대부터 추진하려 했던 개혁을 관철하는 계기로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 지주형은 IMF 구제금융을 ‘트로이의 목마’에 비유하며 이렇게 쓴다. “‘트로이의 목마’를 만든 건 그리스인들이었지만 성안으로 들여온 것은 사실 트로이인 자신들이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을 IMF 구제금융으로 몰아간 것은 미국인들이었지만 ‘IMF 플러스’ 개혁안을 먼저 제시하고 받아들인 것은 한국인들이었다.” 이는 ‘IMF 구제금융’ ‘IMF 외환위기’ ‘IMF 사태’ 등 이 책을 포함해 널리 통용되는 명명이 경제위기의 원인을 IMF에 돌리고 한국 정부의 역할을 은폐하는 효과를 지닐 수 있으며, 그것이 IMF 대 한국이라는 내셔널리즘적 서사와 결합할 수 있기에 중요한 지적이다.

8~9. 이 환란이 ‘공식적으로’ 끝난 지점은 IMF에 빌린 돈을 갚고 그 관리 체제가 종결된 2001년 8월이다. 정부는 IMF로부터 받은 195억 달러를 모두 상환해 3년 8개월 만에 IMF 관리 체제를 ‘졸업’한다. 외신들은 한국이 위기에서 빨리 벗어낫다며 칭송했다. 개혁을 통해 금융과 기업 부문의 재무건전성과 수익성이 대폭 개선되었고, 1998년 3461억 달러까지 내려갔던 GDP가 2017년 현재 1조 5297억 달러로 네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당시 39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액은 이제(2017년 8월 기준) 3848억 달러로 세계 9위 규모다. 어두웠던 과거는 뒤로 밀려났고, 이제 그 시절은 향수 섞인 목소리로 ‘응답하라’로 부르면 그만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IMF 서사를 거부하는 데서 시작한다. IMF 위기를 단순한 외환 부족에서 일어난, 그것을 갚은 뒤에 진화된 단기간의 사건이 아니라, 전 지구적 변동 속에서 그때까지 한국을 이끌어온 권위주의 개발국가 시스템 자체가 문제시된 사태,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야기한 핵심 계기로 파악하고자 한다. IMF의 시간을 ‘그때는 어둡고 어려웠었지’의 시간이 아니라, IMF 위기와 그 해법을 통해 새로운 금융 축적의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고 신자유주의가 삶의 영역마저 잠식하게 된 한국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시간으로 바라보려 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당시의 신문지면을 차지했던 수많은 몰락의 드라마는 없고, 이 막연한 ‘구조적 변동’이 한 사람의 라이프코스 속에 남긴 흔적들은 있다. ‘IMF’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으며 회고의 대상이 아니라 거의 무매개적으로 우리와 함께하게 된 시대의 공기다. 이 책 에서의 ‘IMF’란 바로 그런 것을 가리키며, 그 시대의 공기, 너무도 익숙해진 시간을 사고하게 하는 매개의 기능을 한다.

11. 여기서 IMF는 인터뷰이 각자에게 자신이 시간을 보내온 혹은 시간을 보냄으로써 형성되는 ‘사회’라는 것을 떠올리고 자신의 생애를 그것과의 관련 속에서 말하게 만드는 매개장치다.

13~14. 그/그녀가 경험한 일들을 내가 이미 상정해놓은 사회적, 역사적 흐름 속에서 상징적이고 대표성 있는 일화로 끌고나가려는 의지와, 모든 일어난 일의 의미를 결코 그런 식으로는 처리할 수 없다는 주저함 사이의 긴장이 있었다. 말하자면 1, 2, 3, 4라는 개인적 경험과 실패를 ㄱ, ㄴ, ㄷ, ㄹ이라는 어떤 사회적 사건들, 전형, 패턴에 일직선으로 그어 잇는 식으로 보여주는 것을 경계했다. 하지만 이런 선 긋기가 ‘과정’으로서 동반되지 않는다면, 즉 끝까지 밝힐 수 없는 불투명성을 지닌 개인과 사회 속에서만 성립하는 개인 사이의 왕복 운동이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이해될 만한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을 테고, 이 이야기의 사회적인 힘도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언제나 ‘사회화된 존재’와 ‘사회화되지 않은 존재’의 끊임없는 긴장관계 속에 위치하고 영위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해서, 인간은 언제나 사회의 안팎에 동시에 존재한다. ‘사회’를 실재하는 통일체로서가 아니라 개개 인간의 사회적 행위의 특정한 단면을 통해서만 인식 가능한 것으로 파악하고 탐구했던 19세기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그의 작업 속에서 “사회적 환경 속에 위치하는 개인”으로서의 ‘양적 개인’과 “사회적으로 조건지어지지 않으면서 내적으로 자족적인 - 또는 외적으로 배타적인 - 개개인”으로서의 ‘질적 개인’을 매우 엄격하게 구분했다. 이 책을 쓰면서 이러한 구분과 그 사이의 운동을 ‘사회 속의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삶(상호작용)이 영위되는 곳으로서의 사회’를 그릴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개념장치로 염두에 두고자 했다.

15.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이 책의 인터뷰이들을 알게 되고 섭외해 책으로 내기까지의 ‘과정’이 책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책에 관한 하나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한계’라는 단어로 바꿔도 좋다.

17~18. 결국 내가 찾을 수 있었던 건 친구든, 트위터 지인이든, 소개 받은 이들이든, ‘살아남은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분명 모든 인터뷰이의 삶은 그들 각자의 피곤과 근심과 불안에 젖어 있었지만 그래도 자기의 살아온 시간을 이 정도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신이 위치한 좌표를 이해하고 그 뒤를 돌아보거나 앞을 내다볼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내가 보낸 이 사회의 30년을, 1997년 이후의 세계의 ‘진실’을 가장 분명하게 비춰줄 사람들은 이미 가시권 바깥으로 사라져버린 게 아닐까? 찾아낸다 하더라도 그들은 나를 사로잡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살아온 것과 살아온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자신만의 삶의 전기를 써내려갈 자원”은 곧 “자율적 선택의 폭”이며, 이 선택의 폭이 적은 이들이야말로 ‘IMF 이후’라는 구조의 영향을 뚜렷하게 몸에 새긴 사람들일 것이다.

76. 흔히 ‘IMF’라 불리는 그 사건은 한국이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그들의 해법을 받아들인 일뿐만 아니라, 위기를 극복하고 한국 경제가 안정을 되찾는 과정에서 특정한 계층에 대한 선택과 배제가 이루어진 일, 이에 따라 사회의 어떤 집단들을 특권적으로 만든 동시에 어떤 집단들은 반대로 더 가장자리로 밀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기를 온 국민이 “하나되어” 극복한 것으로 기만한 채 생존 경쟁만을 내면화해온 시간을 모두 의미한다. 소설 <1997 방사능 치킨 극장>은 이 과정 내내 계속 바깥으로 밀려난 한 가족을 통해 우리 시대에 IMF가 무엇이었는지를 정면으로 묻는다.

80~81. 성남시 분당구가 수도권 1기 신도시 다섯 곳 중 하나, 계획인구 40만 명(10만 5천 가구)이라는 다섯 곳 가운데 최대 규모의 ‘분당’이란 고유명사로 거듭나는 사업이 시작된 것은 서울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 최초 입주가 시작된 것은 1991년 9월의 일이다. 서울 강남 지역의 전체 아파트가 23만 가구에 불과하던 시절, 이제 막 입주가 시작된 신도시에는 상업 시설 부족을 포함해, 자족 기능이 미비했던 시절이다. 김재욱이 기억하는 그때 살던 32평형 아파트의 매매가는 3000만 원, 전세가는 1500만 원이었다. (중략) 1기 신도시의 공사가 완료된 1995-96년까지만 해도 이 사업은 실패에 가깝게 묘사되었다. 도시의 자족 기능 미비로 사람들은 여전히 서울로 출근했으며 서울로 놀러 소비하러 다녔다. 출퇴근 시간엔 인근 도로가 꽉 막히고 낮엔 텅 비는 베드타운이라 놀림받았다. … 하지만 1기 신도시 착공이 10년 된 시점인 1999년부터는, 특히 분당과 일산이 최신 유통업체가 일순위로 진출하는 유통 천국이자 부동산 경기를 주도하는 곳으로서 수도권 내 가장 경쟁력 있는 주거 지역이 됐다. 이 과정에서 아파트 매매, 전세, 분양권 가격은 크게 올랐고 이와 동시에 어떤 이들은 바깥으로 밀려났다.

83. 1995년 주유소 간 거리 제한이 완전 폐지되면서 정유사들은 자사의 주유소를 세우기 위해 개인사업자들에게 대규모 자본을 투입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101. 무엇을 한들 ‘차곡차곡 쌓아서 뭔가를 이루기’보다 단속적으로 시달리고 소모될 가능성이 높은 시대, ‘확실히 아닌 것’부터 정하고 그걸 피하는 데 전력을 쏟는 그의 행동은 차라리 합리적으로 보인다. … 소설 쓰기는 여기서 또 한 번 ‘다른 건 하기 싫다’라는 네거티브한 동기를 밀어붙인 결과였다.

102. <쇠당나귀> 구상은 군대에 있을 때부터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걸 써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배경지식은 아무것도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파기 시작했죠. 나중에는, 도서관 조선 후기 역사 분야 있잖아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읽었어요. 논문 저자한테 메일 보내서 묻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쓰고 해서, 다 합치면 6개월 정도 걸렸을 거예요. 근데 절박한 게 있으니까. 내가 여기서 이걸 못 하면 취직해야 되니까. 너무 싫었죠. 저는 모든 동기가 네거티브한 거 같아요. 하기 싫으니까, 그걸 안 하기 위해 다른 걸 열심히 하는 거예요.

110~111. “위기의 해법은 사물들이 움직이는 방식을 오랫동안 규정한다”고 프랑스의 철학자 레지 드브레는 말했다. 이는 <1997 방사능 치킨 극장>에도, 김재욱이 이 소설을 쓰면서 IMF 외환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가장 많이 참고했다는 지주형의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에도 인용되는 말이다. 오래전에 쓰인 이 문장은 ‘한국전쟁’ 같은 물리적 파괴가 아니었음에도 IMF 위기가, 그 해법이 왜 우리 삶에 그렇게 큰 사건이었는지를 함축해 보인다. 지주형은 현실의 위기 해석과 그 관리를 결정하는 것은 그 위기의 객관적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기관리에 따라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볼 수 있는 사회세력들 사이의 직간접적인 사회적ㆍ정치적 투쟁”에 의해서임을 역설한다. 단순한 외환위기가 아니라 금융, 산업, 발전 모델, 정치까지 아우르는 넓은 분야에서, 그 시점 한국이 내외적으로 경험해온 역사 속에서 형성된 매우 복잡하고 특수한 현실의 위기였던 IMF 위기 역시 그야말로 이런 정치적이며 구체적인 투쟁 과정을 통해 ‘해결’되고 그다음 단계로 진입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미 재무부와 월스트리트, 그리고 그동안 여러 차례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시도해왔던 한국의 경제관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지배적인 위기관리의 방식이 결정되자 승리한 집단에겐 전리품이, 패배한 집단엔 고통이 배분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승패의 여파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기로 증폭된 불확실성 덕택에 열렸던 여러 대안적인 미래의 가능성들이 위기 효과와 위기관리 비용이 불균등하게 배분되면서 하나둘씩 제거된다는 점이다. 지배적인 위기관리 방식에 순응하면 생존하거나 보상을 받고, 저항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면 처벌을 받거나 도태된다. (…) 특정한 수준의 위기에 초점을 맞춘 위기관리를 통해 다른 종류의 경험이 배제되고 특정한 종류의 경험이 반복됨으로써 행위자들은 특정한 교훈과 형태를 내재화한다. 보상을 받고 선택되는 행태는 강화되고 처벌을 받거나 도태를 가져온 행태는 약화된다. 그 결과 초기의 차별적이고 불균등한 사회적 배분이 구조화되면서 새로운 사회 구조로 나아가는 장기적 발전 경로가 형성된다.” “1997년의 해법은 여전히 우리가 움직이는 방식을 규정하고 있다”고 재욱 씨는 소설에 썼다. 인용한 지주형의 통찰을 빌리자면 이 해법은 우리가 움직이는 방식뿐 아니라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마저, 가능성을 셈하는 시야마저 규정하고 내면화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눈에 띄는 상처 없이 살아남았다 해도 이 사회에 사는 이상 우리의 선택들이 이 특정한 발전 경로의 작용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긴 어렵다. 김재욱은 소설에서 그 점을 말하려 했고,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27. (학원에서 배운 건)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했어요. 내가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시행착오를 통한 배움을 갖기도 전에 나의 확고한 생각과 취향이 정해졌으니까요.

_ 안은별, , 코난북스, 2017.

February 15, 2019: 10:29 am: bluemosesErudition

“Though the fig tree should not blossom, nor fruit be on the vines, the produce of the olive fail and the fields yield no food, the flock be cut off from the fold and there be no herd in the stalls, yet I will rejoice in the Lord; I will take joy in the God of my salvation.”

February 14, 2019: 9:37 pm: bluemosesErudition

오즈 야스지로,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

이마무라 쇼헤이, <우나기 선생>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 9:34 pm: bluemosesErudition

“2006년 칸영화제에서 <괴물>이 최초로 공개되었을 때 수많은 반응이 쏟아져 나왔지만 많고 많은 평론가와 기자 들의 그 어떤 코멘트보다 내 가슴에 강렬하게 새겨진 건 일본의 어느 나이 든 영화제작자의 코멘트였다. “이것은 마치 이마무라 쇼헤이가 만든 괴수 영화 같다.” 매우 가슴 설레고 영광스러운 코멘트였다. 이마무라 쇼헤이라는 거장의 이름은 내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살인의 추억>을 준비할 때도 그의 역작 중 하나인 <복수는 나의 것>, 실제 일본 연쇄살인마의 흔적을 그린 이 괴력의 작품에서 큰 영감과 자극을 받았고, <돼지와 군함>이라든가 <붉은 살의> 등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영화들을 오랫동안 존경해왔다.”(봉준호)

: 8:18 pm: bluemosesErudition

하나님 나라(방향), 성령 충만(동력),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1:18)

: 8:14 pm: bluemosesErudition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아무 것도 바꾸지 않았습니다.”(태극당)

: 3:49 pm: bluemosesErudition

“김수영은 1966년 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라고 말한 바있다. 나는 차라리 그의 비밀의 상당 부분은 그가 번역을 했건 안 했건 그가 읽은 것 속에 있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무슨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아주 필요하고 긴요한 일이다. 그 작업은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시·산문에 나오는 책·사람 이름의 목록이라도 만들고, 어떻게 그가 그 책이나 사람을 읽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가 자유롭게 접근한 일본어·영어로 씌어진 책에 나는 그만큼 자유롭게 접근하지 못한다. 오래 전에 생트 뵈브는 브왈로를 평하면서, 그는 핀다로스를 헌신적으로 사랑했지만 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쓴 바 있다. 내가 그런 평가의 대상이 되지나 않을까 두렵다.”(김현)

: 3:14 pm: bluemosesErudition

“에릭 로메르는 다른 누벨바그 감독에 비해 훨씬 뒤늦게 알려졌지만 ‘최후의 누벨바그’라는 말을 들을 만큼 가장 지속적으로 누벨바그 영화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감독이다. 60년에 발표한 그의 첫 장편영화 <사자의 신호>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로메르는 동료들이 영화감독으로 전업해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 <카이에 뒤 시네마>를 지키면서 편집장을 역임했고 서서히 자신의 작품세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로메르의 야심은 18세기 철학자 파스칼, 라브와이예르, 라 로슈푸코 등과 같은 ‘도덕주의자’(Moraliste)의 실천을 영화로 옮기려는 것이다. 프랑스말로 도덕주의자는 도덕이라는 말의 일반적인 뜻과는 다르다. ‘도덕주의자’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과연 로메르의 영화는 “난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도중 뭘 생각하는지에 관심이 있다. 행동이 아닌 생각을 담은 영화 말이다”라고 말한 언명을 증명하는 바가 있다. 로메르는 식탁에서 등장인물이 파스칼의 철학을 읊는 따위의 사소한 대화장면에서도 등장인물의 마음을 읽어내는 놀라운 영화기법과 정신의 소유자다.”

: 1:34 pm: bluemosesErudition

“작곡가 드보르작은 새로운 곡을 쓸 때마다 ‘하나님과 함께’라는 문구를, 끝날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할지어다’라고 썼습니다. 세바스찬 바흐는 그의 악보의 여백에 쉴 새 없이 ‘SDG(soli deo gloria)’ 혹은 ‘어린 양께 영광을’이라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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