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5, 2018: 10:22 am: bluemosesErudition

11~12. 선배는 나를 처음 야구장에 데려가준 사람이었다. 홍대 인디 문화가 뭔지, 대학로 소극장의 서늘함이 얼마나 기분 좋은 건지 알려준 사람. … 나는 지금껏 선배처럼 이상적인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존경도 하고, 말벗도 하고, 괜찮다면 잠도 같이 자고 싶은 사람. 혹 요사스런 성적 취미가 있다 해도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이 좋아요’라고 말하며 눈 딱 감고 따라가보고 싶은 그런 상대 말이다. 당시 나는 사내들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세상엔 두 종류의 남자가 있는데, 착하고 재미없는 남자와 재밌지만 나쁜 남자가 전부라는 생각이었다. 세계가 그렇게 납작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사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닌 인간의 복잡함과 울퉁불퉁함을 잘 헤아릴 줄 아는 남자라는 것 역시 뒤늦게 깨달았지만.

12~14. 교정의 초목과 잘 식은 봄밤 공기는 가슴을 떨리게 하기 충분했다. 지금도 나는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라는 식물의 방어 물질에 사랑의 묘약이 섞여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학기의 그 많은 청춘이 그렇게 동시에 상기된 채 헤롱댈 수는 없는 일이다. … 나는 스무 살을 새로운 도시에 맞는 게 좋았다. 철학과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안색에도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나이엔 의당 그래야 하는 듯 알 수 없는 우울에 싸여 있었고, 내 우울이 마음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단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나는 모임에서 이탈한 주제에 집에 기어들어 가지 않고 인문대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스스로 응석을 부리며 뭔가 흉내 내는 기분이 못마땅했지만. 숨은 그림 찾아내듯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내 이마에 크고 시원한 동그라미를 그려주길 바랐다. …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훗날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어냐고 물어왔을 때,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이라 답한 것은.

15.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줄 때면, 뭉클하니 아늑해져 까치발을 든 채 ‘더요! 더요!’라고 외치고 싶어지곤 했다.

17~18. 티브이도 없고 컴퓨터도 없는 음습한 자취방에서 이따금 확인하는 선배의 문자가 참 반가웠던 기억은 난다. 한밤중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조그만 불빛을 따라 내 마음도 빨갛게 깜빡거렸다는 것과, 그 나이에만 쓸 수 있는 순수하고 유치한 문장들에 내가 퍽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선배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쉽게 판단하거나 충고하지 않았고, 범박하고 산뜻한 농담도 잘 해줬다. 상대에게 수치심을 주지 않으면서 위로하는 방법을 알았다랄까. … 그 시절, 나는 어딘가 아프고 피곤하면 무턱대고 긴 잠을 자는 버릇이 있었다. 어느 때는 기면증 환자처럼 이틀 내내 곯아떨어져 있기도 했다. 그날 역시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선배가 선물해준 ‘어떤 날’을 카세트에 넣고 틀었다. 뒷면에 건전가요가 들어 있는 오래된 테이프였다. 방 안 가득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 잔잔하게 퍼졌다. 그러자 문득 선배에게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19. “야구장은 신전이야.” 나는 ‘아!’하고 감탄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반하는 순간 심장에서 울리는 효과음이었다.

19~22. 하지만 선배가 진심으로 좋아진 계기는 따로 있었다. 선배가 나를 알아봤듯 나도 선배를 알아본 순간이었다. 선배가 4학년, 내가 2학년이던 여름밤. 전국적으로 유례없는 열대야가 지속되던 때. … “신기해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곡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 그것도 번번이요. 처음 가본 길, 처음 읽은 책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버리는 것 같아요.” 나는 ‘아니, 내가 이렇게 멋있는 말을 하다니!’하고 혼자 감탄했다. 하지만 선배의 쪽지는 더 근사했다. “우리가 신을 잊을 수 없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거야.”

23~24. 모니터 위로 느릿느릿 사람들 모습이 지나갔다. 선배와 나는 친근한 얼굴이 보일 때마다 품평을 하고 낄낄댔다. 그러다 내 사진이 나왔다. 벚꽃을 배경으로 학교 옥상에서 찍은 독사진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친구가 맞은편 건물 안에서 셔터를 눌러, 창문 주위의 네모난 어둠이 액자처럼 봄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봄 한가운데에 내가 있었다. “이 사진 좋다.” 선배가 ‘일시 정지’ 단추를 눌러 슬라이드 쇼 상태에서 자동으로 넘어가는 사진을 멈추게 했다. “난 싫은데.” “왜?” “이 가방 때문에요. 옷이랑 너무 안 어울리잖아요. 다리도 굵게 나오고.” 나는 황토색 인조가죽 가방을 가리키며 투덜댔다. 당시 내게 하나밖에 없던 가방이라 아무 옷에나 줄기차게 들고 다닌 거였다. “난 저 가방 때문에 이 사진이 좋은데.” 선배가 모니터를 응시하며 말했다. “에? 왜요?” 선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 여자의 ‘생활’이 보여서.” “……” 나는 푸른 불빛에 얼비친 그의 옆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 사람을 본격적으로 좋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세상에 내 사진을 보고 그렇게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선배밖에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44. 아직 상복을 벗지 못한 채 울고 있는 나를, 여름옷을 주렁주렁 매단 2단 옷걸이가 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굽어보고 있었다.

144. 도시 곳곳에는 한쪽 손을 번쩍 들어 택시를 잡은 뒤, 술에 취해 아름답고 어그러진 말들을 차비처럼 내려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173. 기옥 씨는 커튼을 걷고 방 안을 환기시켰다. 골목에서 한 노인이 오토바이 뒤 칸에 쓰레기봉투를 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음식물 종량제 쓰레기봉투에서 새어나온 구정물 냄새가 청량한 새벽 공기를 타고 기옥 씨네 집까지 들어왔다. 간밤, 잠을 설친 도시가 찌뿌둥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내는 구취였다.

297.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298. 그 일로 원래부터 여유가 없었던 우리 집은 더이상 복구가 안 될 정도로 폭삭 주저앉고 말았어요. 집안에 닥친 불운의 자장이 너무 강해, 잘못 하다간 나까지 빨려들어 갈 것 같아 돕고 싶기보단 도망치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였죠.

_ 김애란, <비행운>(너의 여름은 어떠니, 하루의 축, 서른), 문학과지성사, 2012.

: 10:14 am: bluemosesErudition

학생부교과전형이란?

September 3, 2018: 11:15 am: bluemosesErudition

강은교 시인이 번역한 에밀리 디킨슨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 12:20 am: bluemosesErudition

올리브 나무 평균수명: 600년

스페인 영주권 취득액: 약 8억

September 1, 2018: 3:36 pm: bluemosesErudition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제해버리다’라는 말이 ‘깨끗함’이라는 말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그리고 ‘깨끗함’이 ‘과실을 맺지 아니함’과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대답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할 수 있다. 첫째, 요한복음 15장에 ‘제해버리다’라고 번역된 ‘아이로(airo)’라는 헬라어 단어의 보다 분명한 의미는 ‘들어올리다’ 혹은 ‘집어올리다’이다. 예를 들어, 아이로의 보다 정확한 번역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제자들이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차게 ‘거둔’ 사건(마14:20)과 구레뇨 시몬에게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한’ 사건(마27:32) 그리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설명했던 사건(요1:29)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상 성경에서나 헬라어 문학에서 아이로라는 단어가 ‘제해버리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5장에 ‘제해버리다’라고 표현된 것은 적당하지 않은 해석이다. ‘들어올리다’라는 말은 가지를 들어올리기 위해 그 위로 상체를 굽히는 농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왜? 그 대답을 몇 년 전 웨스트 코스트에서 있었던 목사들을 위한 수련회에서 알게 되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을 한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요한복음 15장을 이해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완전하게는 아닌데요. 왜 그러세요?”라고 대답했다. “전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큰 포도밭을 재배하고 있어요. 그래서 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에게 커피를 사겠다고 했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앉자 그는 포도밭 곳곳을 다니며 오랜 시간 포도나무를 손질하고 포도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추수하기에 가장 좋은 날을 기다리는 농부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지들은 밑으로 쳐져 땅 위를 기며 자라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열매를 맺지 못해요. 땅 위를 기면서 가지가 퍼지게 되면 잎들이 먼지에 뒤덮이게 되거든요. 그리고 비가 오면 진흙이 묻고 곰팡이가 피게 돼요. 그러면 가지는 병이 들고 쓸모없게 되지요”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럼 어떻게 하시나요? 잘라서 던져버리나요?” 나는 물었다. 그는 “아니오”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가지는 던져버리기에는 너무 귀해요. 우리는 물이 든 양동이를 가지고 포도밭을 돌아다니며 그런 가지들을 찾아요. 그리고 들어올려서 씻어주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검게 그을린 거친 손으로 내게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런 다음 울타리 주위에 매주거나 그 위에 묶어주지요. 그러면 곧 무성하게 잘 자라요.” 그가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그날 밤 포도밭에서 가르치시며 하셨을 예수님의 손동작을 그려볼 수 있었다. 예수님은 맛있는 과실의 풍작을 위해 아버지께서 어떻게 그 농작물을 돌보시는지 확실하게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떨어진 가지들을 흙 속에 내버려두거나 던져버리지 않으신다. 들어올려 깨끗이 닦아주시고 다시 무성해질 수 있게 도와주신다. 불현듯 나는 놀라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들어올려… 깨끗케 하고… 그 후로 나는 요한복음 15장을 다시는 그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읽지 않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죄는 포도 잎사귀를 뒤덮는 먼지와 같다. 공기와 빛을 차단한다. 그래서 가지는 시들어가고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 우리의 농부께서 진창과 곤경에 빠진 우리를 어떻게 들어올리시는가? 바구니에 열매를 채우는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의 황폐해진 가지를 어떻게 아름답게 하시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포도나무의 첫번째 비밀이다. 포도나무의 첫번째 비밀.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이 계속된다면 하나님께서 징계하기 위해 당신의 삶에 개입하실 것이다. 필요하다면 회개하게 하시려고 고통스런 방법을 사용하실 것이다. 그분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보다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죄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이 과정을 훈계 혹은 징계라 말하고 있는데 나는 우리가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 가장 좋은 소식이라 부른다. 징계는 우리가 추구하는 헛되고 파괴적인 것들로부터 떠나도록 우리를 들어올리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실 때 일어나게 된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신8:5)

_ 브루스 윌킨슨+데이빗 콥, <포도나무의 비밀>, 디모데, 2002, 52~58쪽.

: 2:33 pm: bluemosesErudition

욧잇. 요의 몸에 닿는 쪽에 시치는 흰 헝겊.

: 1:26 pm: bluemosesErudition

가장 힘들었을 때는.

“2014년 버지니아공대에서 UCLA로 옮길 때였다. 굳게 믿었던 멘토 교수에게 배신을 당해 나의 분신 같은 로봇들을 모두 뺏겼다. 내 최고의 걸작품이었던 휴머노이드 로봇을 강탈당한 거다. 나는 여기서 끝나는가 보다, 이제 더 이상 길이 없나 보다 싶었다. 로봇이 없는데 내가 뭘 할 수 있었겠나. 하지만 로봇도, 사람도 넘어져야 배운다는 말이 맞았다. 이렇게 된 거 아예 새롭게 가자 싶었다. 마침 후쿠시마 원전 사고 현장에 다녀온 뒤 사람처럼 걷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한계를 절감하던 터였다. 너무 느리고 비싸고 잘 넘어졌다. 발상을 전환했다.”

이후 그는 로봇의 몸통을 직육면체로 과감히 바꾼 뒤 발레리나와 펜싱 선수의 움직임에서 영감을 얻어 두 다리를 좌우가 아닌 앞뒤로 배치했다. 그러자 수많은 미제들이 순식간에 해결됐다. 그의 명성은 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그는 월트 디즈니의 사례를 떠올렸다. “디즈니도 오스왈드라는 토끼 캐릭터를 만들고 꿈에 부풀어 있을 때 믿었던 프로듀서에게 어이없이 뺏기며 모든 걸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좌절 대신 메모지와 펜을 꺼내 새로운 캐릭터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미키 마우스였다. 내가 만든 로봇들을 뺏기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 또한 없었을 거다.”

그의 실패론은 계속됐다. “실패를 통해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성공할 수 없다. 혁신도 마찬가지다. 혁신은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걸을 때 나오는 법이다. 떨어질까 무서워 안전한 곳으로만 가면 혁신은 불가능하다. 연구소에서도 학생들에게 로봇을 일부러 고장 내게 한다. 고장이 나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하면 행복한 거고 실패하면 배운 거다. 중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뽑아내는 것. ‘긍정은 언제나 길을 찾는다’가 내 신조인 이유다. 실패에서 배우면 더 이상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 1:22 pm: bluemosesErudition

나희덕의 문학은 만물에 대한 글썽임에서 시작한다. 고아원을 운영한 부모님 덕에 시인은 소외된 아이들과 가난하고 외롭게 자랐다. 만물에 대한 글썽임은 그때부터 시작됐는지 모르겠다. 1989년 본지 신춘문예로 등단했을 때 그는 소감에 “나에게 지금 필요한 건 발표 지면이 아니라 삶의 억압 속에서도 살아있는 목소리를 가지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25년 동안 세상의 고통과 치열하게 대면하면서 약속을 지켰다. …. 미당처럼 타고난 서정시인이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부수고 새로 지었다. 특히 근 몇 년은 올해 초 발표한 시집의 제목처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그건 죽음과 비애와 눈물의 말이다. 20대의 나희덕은 사랑과 윤리, 종교적 세계관 속에 살았고 30대엔 사랑과 치욕의 양면성을 알게 됐으며 마흔을 넘어서면서 도처의 죽음을 끌어안았다.

“일찍 결혼하고 나서 생활인으로서의 누추함을 알게 됐어요. 메워도 메울 수 없는 빚이 정신을 짓눌렀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통과하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아이들이 ‘엄마는 파란만장을 자초하고 산다’고 말해요. 일부러 불안정적인 요소를 늘려가는 것 같아요. 그것이 시를 쓰기에 고집스럽고 완고한 저를 길들이고 죽이는 방법인 거죠.”

: 1:48 am: bluemosesErudition

막연한 인식. 더 알아가고 더 헤아리는 것. 해석학적 순환 속에 이루어지는 지평융합

: 1:46 am: bluemosesErudition

초월론적 현상학 _

세계의 일부인 의식이 구축한 세계(= 유식무경, 일체유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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