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for '성화'


January 7, 2018: 3:05 am: bluemosesErudition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1954~)도 서머스를 편들었다. 그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전제한 뒤 “다양한 실험들이 보여주듯, 평균적으로, 여성은 수학적 계산과 언어능력 등에서 남성보다 뛰어나고, 남성은 공간지각능력과 수학적 추론 면에서 앞선다. (…) 내 분야인 언어발달 연구분야에서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기계공학 분야에선 남성들이 약진하는 건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서머스의 발언을 성차별로 공격하는 건) 공정성(fairness)과 동일성(sameness)를 혼동한 결과다”라고 말했다.(WP, 2006.7.13) 논쟁이 격해지면서 핑커는 “베어리스는 과학을 오프라쇼(science to Oprah) 수준으로 격하시킨다”고 비난했고, 맨스필드는 그를 “정치적 얼뜨기(political fruitcake)”라고 조롱했다.(NYT, 2006.7.18)

베어리스는 미국의 4~18세 청소년 2만 명의 수학 성적을 조사한 결과 유의미한 젠더 차이가 없었다는 데이터, 여성과 소수자가 연구비를 타기 위해서는 남자보다 2.5배의 연구실적이 필요하더라는 조사자료, 전년 미 국립보건원(NIH)의 혁신과학자상(Pioneer Award) 심사위원 64명 중 60명이 남성이었고 수상자 9명 전원이 남성이었다는 사실, 서머스를 편든 하버드대 정치학자 하비 맨스필드(Harvey Mansfield, 1932~) 등이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감정적(덜 이성적)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서는, 분노에 의한 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건 여성보다 남성이 25배나 많다는 데이터를 들어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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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와 척수 등 신경조직은, 크게 나눠, 뉴런이라 불리는 신경세포와 뉴런을 감싸고 있는 신경교세포(neuroglia cell, 신경아교세포)로 구성된다. 과학이 최근 100년간 주목해온 건 당연히 뉴런이었다. 뉴런은 전기ㆍ화학적 신호를 주고받으며 감각, 운동, 사고 등 복잡한 인지ㆍ생명활동을 담당한다. 뉴런보다 10배 가량 세포 수가 많은 신경교세포는, 아교라는 이름처럼, 뉴런을 붙잡아주는 지지대 혹은 산소나 영양을 공급하는 보조역 정도로 홀대 당했다. 그런데, 뉴런과 신경교세포(줄여서 교세포, glia)가 주종관계가 아닌 대등한 협력관계라는 사실이 10여 년 전 밝혀졌다. 교세포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저마다 기능이 달라 뉴런 확장과 정보처리 속도ㆍ효율 증강, 뇌 면역을 포함한 신경활동 전반에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였다. 알츠하이머 병이나 파킨슨 병, 다발성 경화증, 루게릭 병 등 다양한 난치ㆍ불치 신경 퇴행성 질병들과 ‘만성’이나 ‘신경성’이라고 얼버무려야 했던 “원인 모를” 통증들도 교세포 이상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그렇게 알게 됐다.

스탠퍼드에서 그와 연구진은, 성상교세포가 뉴런 생성(2005년)및 시냅스 기능 활성화(2009년)에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성상교세포와 미세교세포(microglia)의 면역기능 이상이 만성 통증 및 다양한 퇴행성 신경장애 유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최초로 규명(2017년)했다. 베어리스는 그 해 인터뷰에서 “퇴행성 신경장애 및 질병의 매커니즘을 확인한 것이 우리 연구소 최대 업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건 레지던트 시절 가졌던 의문과 연구자로 진로를 바꾸며 꾸던 꿈의 문을 찾은 데 대한 개인적 소회이기도 했을 것이다.

December 1, 2017: 2:27 pm: bluemosesErudition

저도 끝이고 겨울도 끝이다 싶어
무작정 남해로 간 적이 있었는데요

거기는 벌써 봄이 와서
농어도 숭어도 꽃게도 제철이었습니다

혼자 회를 먹을 수는 없고
저는 밥집을 찾다
근처 여고 앞 분식집에 들어갔습니다

몸의 왼편은 겨울 같고
몸의 오른편은 봄 같던 아픈 여자와
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

메뉴를 한참 보다가
김치찌개를 시킵니다

여자는 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자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저도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봅니다

남자는 돼지비계며 김치며 양파를 썰어넣다 말고
여자와 말다툼을 합니다

조미료를 그만 넣으라는 여자의 말과
더 넣어야지 맛이 난다는 남자의 말이 끓어넘칩니다

몇 번을 더 버티다
성화에 못 이긴 남자는
조미료 통을 닫았고요

금세 뚝배기를 비웁니다
저를 계속 보아오던 두 사람도
그제야 안심하는 눈빛입니다

휴지로 입을 닦다 말고는
아이들이 보고 싶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잔뜩 낙서해놓은 분식집 벽면에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조그맣게 적어놓았습니다

_ 박준, “낙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October 2, 2017: 2:51 am: bluemosesErudition

2009. 존 오웬의 신학

2010. 인문 고전 강의

2011. 성화와 기도

2012. 관대한 정의

2013. 기독(목회)상담, 어떻게 다른가요

2014. 역사 고전 강의

2015. 정치를 말하다

2016. 한나의 아이

2017. 드웰

September 17, 2017: 6:34 pm: bluemosesErudition

신화는, 성화와 다르다. 독일 낭만주의에서 분열과 소외를 초극하는 포월이, 神化다.

July 23, 2017: 3:08 pm: bluemosesErudition

정결의 3단계: 피, 불(백향목 · 우슬초 · 홍색 털실), 물 _ 칭의는 성화의 전제다. 이것이 종교개혁 500주년에 기념할 루터의 각성이다.

July 8, 2017: 8:12 pm: bluemosesErudition

칭의는 성화의 기관차

June 18, 2017: 1:22 pm: bluemosesErudition

루이 조르주 탱의 <사랑의 역사 - 이성애와 동성애 그 대결의 기록>은 이성애가 사회의 기본 요소가 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였다면서, 그 이전은 이성보다 동성끼리의 친교가 더 소중한 ‘동성사회성’ 높은 사회였다고 주장한다. 17세기 후반 이전은 봉건사회였으며, 봉건사회를 지탱한 것이 남성들로 이루어진 전사(귀족) 계급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쉬이 납득이 된다.

“봉건 문화의 토대는 오로지 남성만의 세계다. 남자, 특히 전사는 흔히 여자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다. 이 기사들은 개인적인 용기, 즉 프뤼돔(prud’homme, 용맹스러운 남자)의 용기와 봉건 질서에 대한 충성스러운 복종의 윤리, 즉 봉신의 윤리를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집단생활과 군사작전 그리고 위험을 함께한 경험이 불러일으키는 열광은 명백히 단순한 동지애를 종종 넘어서는 매우 확고한 유대를 낳았다. 이러한 사나이들 간의 우정은 흔히 두 기사로 하여금 죽음도 불사하도록 만드는 열렬한 관계로 발전되기도 했다.”

<롤랑의 노래>에서 보았듯이 기사도 문학 본래의 이상은 동성사회의 규범을 다루는 것이었으나, 이성애가 침투하면서 기사들이 왕이나 영주의 부인에게 충정을 바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루이 조르주 탱의 <사랑의 역사>는 분석을 생략했지만, 중세를 지나면서 남자들만의 동성문화가 추방되고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궁정문화가 예찬되어야 했던 이유는 무장한 기사들을 순화하기 위해서였다. 노베르트 엘리아스라면 궁정의 귀부인이 중세 남성들 사이의 격렬한 우정을 흡수해가는 이 과정을 ‘문명화 과정’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나치는 집권 이전부터 동성애자를 국가와 민족의 적으로 간주했으나, 정권을 차지한 히틀러는 왠지 동성애자 단속을 망설였다. 그 까닭은 당·친위대·돌격대·히틀러청소년단 등 나치 체제를 뒷받침했던 주축 조직이 모조리 ‘남성동맹’이었기 때문이다. ‘봉건적 의리’와 ‘사적인 결속’으로 짜인 나치의 역동성은 루이 조르주 탱이 우정보다 더 강렬한 감정이라고 말했던 높은 동성사회성에서 나온다. 나치는 자기 조직을 탈성화(脫性化)하면 “남성동맹의 역동성이 약화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나치가 동성애자 적발에 전력하게 된 것은 소련과 전쟁을 벌이면서, 내부의 적을 판시할 필요 때문이었다. 동성애자 문제로 나치가 직면했던 곤경은 동성애 혐오증이 극도로 남성화된 집단이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자기방어라는, 잘 알려진 결론과 만나게 해준다.

고(故) 기형도 시인은 게이들의 크루징(cruising, 공공장소에서 데이트 상대를 찾는 일) 장소였던 파고다극장에서 급사하는 바람에 게이였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또 죽기 한 해 전인 1988년, 대구에 있는 나를 찾아와 “그에게 내 고통의 윤곽을 조금 말해주었다”라고 썼던 여행일지가 마치 ‘커밍아웃’을 한 것인 양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장소로 말하자면 게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호기심을 느낄 서울의 명소인 데다가, 그는 기자이자 시인이었다. 또 그는 자기 시의 진로를 놓고 고민을 털어놓았으나, 나는 그의 말을 기억도 하지 못할 만큼 무심히 넘겨들었다. 기형도를 ‘게이 아이콘(gay icon)’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은 그의 시집에 성 소수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퀴어(queer) 감수성’이 충만하다고 하지만, 지배적인 고정관념을 되풀이한다는 뜻에서 나쁜 시인은 다 ‘마초’이고, 소수자의 목소리를 실어 나른다는 뜻에서 좋은 시인은 다 ‘게이’다. 설령 그가 진짜 게이라고 한들, 본인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 모욕이 되길래 이런 석명까지 한다는 말인가? 다만 너무 늦기 전에, 나만 아는 사실을 밝혀둘 뿐이다.

_ 장정일, 2015. 8. 25.

May 10, 2017: 1:25 am: bluemosesErudition

詩란 무엇인가. 못 보는 것을 보고 못 듣는 것을 듣기. “항상 본질이 문제되는 겁니다. 진실한 시인에게 문제되는 건 실로 그 시의 본질입니다.” “여운이 있어야 합니다. 감동의 진동이지요, 지성의 광휘이지요, 인식의 희열이지요. 에즈라 파운드가 얘기했듯이 단순한 산술이 아니라 영감을 가진 산술이지요. 그 비밀, 그 매력을 시인은 모름지기 발견해내고 체득해내지요.”(조병화)

“시에 미혹되어 살아온 지 30년이다. 여전히 시는 알 수 없는 물음표이고, 도저히 알지 못할 허공의 깊이다. 그래서 나는 시를 무엇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으므로 다만 ‘시적인 것’을 탐색하는 것으로 소임의 일부를 다하고자 한다. ‘시적인 것’의 탐색이야말로 시로 들어가는 가장 이상적인 접근 방식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모든 시적 담론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 누구라도 시의 성채를 위해 ‘시적인 것’을 반죽하거나 구부러뜨릴 수도 있다.”(안도현) 위 글에서 ‘시’를 ‘신’으로 바꿔 읽어보라. … 시인은 시가 왔을 때에만 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그 이전에는 시적인 것을 대략 말할 뿐이다. 설교자의 하나님 경험과 증언도 시인의 그것과 비슷하다.”(정용섭)

경험의 수수께끼. 그 괄호 속 실재. “독일어 Wirklichkeit는 지금 여기서 실재하는 것, 현실적인 것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미래에도 참된 것을 가리킨다. …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정용섭) 실재계의 일부를 상징계로 포섭하는 언어의 노작. 이것이 詩인가.

“옷핀에 긁힌 바탕색 이면의 기이한 물고기”, “삶 속에 있는 순간적인 죽음들”, “좋은 시의 요체는 비(非)시적인 혹은 반(反)시적인 일상사의 급소를 급습해서 매몰된 진실과 아름다움을 구조하는 것이다.”(이성복)

이성복의 <극지의 시>에서 재인용한다. “시는 존재의 한 순간을 잊을 수 없게 하고,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한다.”(밀란 쿤데라) 그 순간의 실재는 빛으로 다가온다. “우리의 영혼은 시를 통해서 무덤 너머에 있는 모든 찬란한 것들을 엿볼 수 있다고 보들레르는 말했다. … 보들레르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죽음 뒤에 얻게 될 휴식처를 상상했고, 동반 자살한 연인들이 죽음 뒤에 이루게 될 완전한 사랑을 꿈꾸기도 했다. 죽음 속에서만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적은 없다. 이 세상에서 그 빛을 볼 수는 없지만, 죽는 날까지 내내 시를 씀으로써 저 빛 속의 삶과 가능한 한 가장 가까운 삶을 이 땅의 우여곡절 안에서 실천하려고 했다.”(황현산)

저 빛은 언제 임하는가. “우리가 시를 말할 때 기승전결을 말하지 않습니까. 근데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디냐면 ‘전’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시작해서 이것을 발전시켜 나가다가 그것을 뒤엎는 순간이 바로 그 ‘전’인데요. … 아주 짧은 시를 쓰면서도 바로 이 ‘전’을 만들어내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짧은 글 속에서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다가 이것을 획기적으로 뒤엎는 글도 있습니다. 대개 여기에 해당하는 글, 여기에 해당하는 구절을 내가 좋아합니다. 그런 구절을 읽으면 ‘아, 여기도 희망이 하나 있구나. 아, 여기도 어떤 가능성 하나가 있구나.’ 생각하지요. 그게 슬픈 것이든 기쁜 것이든 어떤 ‘전’을 만들어낼 때가 이 세상에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는 순간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황현산)

“시에는 시의 이름으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는 야금술의 길이 있고 시 아닌 것을 모아 시를 만드는 연금술의 길이 있다.”(신형철)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어떤 것.’ 이 말을 내가 참 좋아한다. 그것이 시가 아닐까. 시를 쓰며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할 때가 가장 기쁘다.”(오은)

“묵호항 덕장에 널린 황태. 마음의 빨랫줄에 걸린 단상.”(박준)

“현상학적 시를 통과하면 다른 내가 된다.”

“몇 갈래의 길이 있다. 전복, 포착, 토로.”

“통각의 사제가 인생이라는 화마에 놓은 맞불”

“어제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재밌는 것을 발견했어요. 재밌다는 말은 나는 모든 것을 시로 연결해 버릇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재밌었다는 말입니다. 거북이가 말입니다. 아가리를 짝 벌리는데 제 혀를 마치 벌레처럼 보이도록 만들더군요. 그러니까 물고기가 그게 벌레인 줄 알고 잡아먹으려다가 도리어 거북이에게 잡아먹히고 말아요.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개미를 잡아먹고 사는 새가 있어요. 그런데 이 녀석은 다른 힘센 새가 자기 알을 훔쳐 먹으려고 나타나면 뱀 흉내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럼 다른 새들은 이게 진짜 뱀인 줄 알고 도망을 가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진실에 의해 보호받는 것도 또 진실을 갖고 제 삶을 유지하는 것도 저런 식이 아닌가 진실이라는 것은 본래 가짜입니다. 아마도 라깡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진실이라는 것은 항상 as if의 형식 즉 마치 뭐뭐처럼 이라는 직유의 형식으로 존재한다고 했었죠. 거북이가 제 혀를 벌레처럼 보이게 만들고 새가 뱀의 흉내를 내는 것 그것은 허구이지요. 마치 뭐뭐처럼 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허구로서의 진실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보호하고 삶을 기획하게 합니다. 시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삶 자체가 허구라면 시는 허구 속의 허구입니다. 그런데 이 허구 속의 허구를 만들어서 삶이라는 허구를 뒤집거나 혹은 무화시키는 것 그런 것이 시겠지요.”(이성복)

“바닷가에 어느날 갑자기 시체가 밀려온다고 쳐보시면 파도로 그 시체에 가장 먼저 달려드는 건 파리입니다. 그 파리가 바로 시인의 자리이지요. 시인은 결국 뭔가를 발견하는 존재인데 그때 발견해야 될 것은 삶 속에 있는 순간적인 죽음들입니다.”(이성복)

“백지에 크레파스로 여러 색을 칠하고 그 위에 검정색을 짙게 입힌 다음 옷핀 같은 것으로 긁으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들이 나타난다. 가령 물고기의 입은 빨갛고 꼬리는 초록색이며 지느러미는 노란색이다. 스스로 바탕색을 칠하고서도 그처럼 기이한 물고기가 나타날 줄은 아무도 짐작 못했을 것이다. 비유컨대 우리의 삶과 세계를 구성하는 상식은 옷핀에 긁히기 전의 검정색이며 문학은 상식이라는 검정색 위에 상처 입히기다.”(이성복)

“시적 자아의 예기치 못한 성화의 도정, 그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발하는 형이상학적 전율”

“진술의 욕망을 잘 연마된 묘사가 절제하고, 묘사의 욕망을 진술이 견제한다. 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터져 나온 말들은 당연히 밀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장력을 잃지 않고 투명하게 응등그린 말들이 삶의 페이소스와 소멸의 시간대를 비출 때 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떨리는 풍경이 된다.”(최두석, 박수연, 손택수)

“통찰력, 그리고 의지, 소통하려는 의지죠,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제시력! 제시력이에요. 제시할 수 있어야 비로소 예술가인 거죠. 예, 때때로 우린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을 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모두 예술가가 될 수는 없어요. 소통하려는 의지, 강렬한 욕구를 가진 사람도 있어요. 그 경우도 마찬가지죠. 그런 의지가 조건이라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지금보다 많을 거예요. 결국, 예술적인 방법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죠. 그래요, 예술은 제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죠. 이 제시의 패턴이 고유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걸로 우리는 어떤 예술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 평가를 내려요.”(송선호)

“연안에서, 소멸의 시간대를 비추는 호명의 빛”

“내면의 더듬이(자아), 바깥의 안테나(타자), 안 쓰던 근육”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도록 하는 글”

“시 평론가 데이비드 오어(David Orr)가 보고하기를, 어떤 임의의 X에 대해 ‘나는 X를 좋아한다’와 ‘나는 X를 사랑한다’의 구글 검색 결과를 비교해보면, 대체로 ‘좋아한다(like)’가 ‘사랑한다(love)’보다 세 배 더 많다고 한다. 예컨대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가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 X의 자리에 ‘영화’ ‘미국’ ‘맥주’ 등등을 넣어도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poetry)’만은 결과가 반대여서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왜일까? 나로 하여금 좀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신형철)

“그래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파블로 네루다)

“너는 시에게 실려 가고, 나는 산문을 끌고 간다.”

“如是我聞과 子曰”

“어디론가 저도 모르게 흐른 뒤, 내적 긴밀성을 더한다. 단, 갇히지 않을 만큼”

“결국, 무엇을 어떻게”

“연필로 밑줄을 그었을 뿐인데 그 선을 따라 숨통이 트인다. 이러면 시지.”(김민정)

“소멸을 비추는 빛, 소멸에 맞서는 불”

불멸을 염하는 노이로제

“시는 가장 개인적인 언어로 가장 심층적인 세계를 가장 무책임하게 주파하는 장르다. 그래서 당대 언어예술의 맨 앞자리에 있을 수 있다. 나는 늘 난해함에는 관대했지만 태만함에는 냉담했다.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편한 시를 써달라고 시인들에게 떼를 쓰는 비평가들이 답답했다. … 간혹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내가 옹호하려 한 것은 난해한 시가 아니라 다른 언어, 다른 세계, 다른 삶을 말하는 시였고, 내가 비판하고자 한 것은 쉬운 시가 아니라 관습적이고 태만하고 타협적인 시였다.”(신형철)

입상진의(立象盡意)

“결국 애가 쓴 시일 뿐인 랭보의 시가 왜 중요하냐고 누가 방금 물었다. 좋은 시는 늘 실패담이다. 그런데 아주 비장하고 순결한 실패담이 랭보의 시다. 그래서 중요하다.”(황현산)

“김수영은 좋은 시를 정의하며 ‘사상이 새로운 언어의 작용을 거쳐 자유를 행사한 경우’라거나 ‘침묵의 한걸음 앞의 시’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어. ‘죽음의 음악이 울린다’ ‘낡은 것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순간’이라고도 했지. 반면 난해시처럼 꾸며 쓰는 시들 앞에서는 ‘언어에 대한 고통 이전에 그 이전의 고통이 모자라다’라며 혹평을 했어. 그뿐만 아니라 삶과 마음의 밑바닥에서 자연스럽게 끌어올려내지 않은 참여시들도 배격했지.”(이시영)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들,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만 한다. 동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시인은 돌이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알지 못하는 지역의 길, 뜻밖의 만남, 오랫동안 다가오는 것을 지켜본 이별,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유년 시절에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 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기분을 언짢게 해드린 부모님(다른 사람이라면 기뻐했을 텐데), 심각하고 커다란 변화로 인해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질병, 조용하고도 한적한 방에서 보낸 나날들, 바닷가에서의 아침, 그리고 바다 그 자체, 곳곳의 바다들, 하늘 높이 소리 내며 모든 별들과 더불어 흩날려 간 여행의 밤들! 이 모든 것을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나같이 다른, 사랑을 주고받는 수많은 밤들, 진통하는 임산부의 외침, 가벼운 흰옷을 입고 잠을 자는 동안 자궁이 닫혀져 가는 임산부들에 대한 추억도 있어야 한다. 또 임종하는 사람의 곁에도 있어봐야 하고, 창문이 열리고 간헐적으로 외부의 소음이 들려오는 방에서 시체 옆에도 앉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추억이 많으면 그것을 잊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추억 그 자체만으로는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추억이 우리들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고, 이름도 없이 우리들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몹시 드문 시간에 시의 첫마디가 그 추억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일어서 나오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 안의 것을 다 고백하고 나서야 오는 빛 … 내가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를, 내가 아니면 안 되는 나의 이야기를 받아 적으며 빛을 기다릴 것이다.”(최지은)

“시를 쓰고 있으면 쉽게 들키고 싶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조금 다른 얘기지만, 시가 암호처럼 보이면, 암호를 풀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시는 더 이상 읽히지 않게 될 거 같아요. 사실은 아무것도 완전히 해결된 게 없는데도, 암호가 풀려버린 기분이 들면 사고가 거기서 멈춰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쉽게 읽히고, 쉽게 들키지 않는 시를 쓰고 싶어요.”(황인찬)

무의식의 시침질은 시가 아니다.

“시의 자궁은 고백과 묘사, 그리고 발견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발견이다. 발견을 외면하는 고백, 발견을 생산하지 못하는 묘사, 에너지가 없다.”(이문재)

“여기서 말하는 ‘대단한 모래정원’이란, 그것을 보았을 때 받는 강한 충격, 뜻밖의 표현, 모래정원을 계열적으로 보았을 때의 전개의 의외성, 미적인 감동 등을 말합니다.”(가와이 하야오)

“내가 말하는 시는 운율과 박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밥 깁슨의 빠른 공처럼 움직이며 적시에 도약하는 언어, 기습과 마찰과 속도로 낡은 세계를 깨뜨려 여는 언어를 의미한다.”(월터 브루그만)

“빛은 아무리 긁어모아 쌓아도 높이가 없고 아무리 파도 깊이가 없지만, 결국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었다.”(신용목)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이 말해졌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것은 아직 전혀 말해지지 않은 듯하다.”(남진우)

“현상학적 관점에서 계몽된 일상언어”(아메데오 지오르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것은 그것을 가진 사람의 삶 전체에 어떤 의무를 부여하지만, 물론 그 의미는 그 사람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처해 있는 환경에 대한 모든 헛된 관심으로부터 그를 구한다.”(키에르케고르)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롤랑 바르트)

“시인은 신비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말해져 버리면 시인은 은행원보다도 신비하지 않을 것이다”(앨런 테이트)

“칼에 목을 내밀며 검은 중심을 숲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 /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미는 거 /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허수경)

“작품 속에서 부시를 비판할 때마다 터져나오는 장내의 웃음이나 박수는, 상영 전후 무어 감독을 향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상영 중의 야유에 가까운 웃음에서는, 양질의 지성이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거북함은 거기에서 기인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부시가 상대를 업신여길 때 짓는, 품성이 결여된 경박한 웃음과 어딘가 깊은 곳에서 통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중략) 사실 내가 봤을 때 <화씨 9/11>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숭고한 뜻에 힘입었대도, 찍기 전부터 결론이 먼저 존재하는 것을 다큐멘터리라고 부르지는 않으련다. 찍는 것 자체가 발견이다. 프로파간다와 결별한 취재자의 그런 태도야말로 다큐멘터리라는 방법과 장르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공격하는 것 같은 작품을 만들어, 잠깐 동안 보는 이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은 고작 제작자의 자기 만족에 불과하다. 오히려 진짜 적은, 이러한 존재를 허용하고 지지한 이 나라의 6할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고이즈미적인 것’이고, 그 병소를 공격하지 않고 안전지대에서 고름(고이즈미)만을 찔러 짜낸대도 병세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고레에다 히로카즈)

“나는 나를 가지고 나도 몰랐던 걸 만들었고”(페르난두 페소아)

“나에게 시를 쓸 수 있게 해준 것은 길이었다. … 몸 속 깊이 숨겨진 내면을 꺼내는 일이고,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나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김기택)

“시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반성이에요. 어떻게 반성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지 마세요. ‘왜 나는 반성하지 않는가’도 반성이에요.”(이성복)

“사실 모든 시는 정치적이야. 김수영이 모든 좋은 시에는 죽음의 리듬이 있다고 말한 것, 그게 바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야. 정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나누는 일인데, 공적이라는 것은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한 자기 죽음 같은 거거든. 일단 죽음을 통과해야 당대의 미학을 끌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그건) 공적인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 문학은 공적인 죽음의 의미를 계속 물어야 해.”(김정환)

“저한테 시를 쓰면서 가장 설레는 지점이 뭐냐고 물어보면 시를 쓰는 순간 어딘가를 건너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극을 쓰거나 스토리를 쓰는 작업을 할 때는 뭔가를 채워간다는 느낌이 강한데, 시를 쓸 때는 내가 모르는 어딘가를 건너간다는 느낌이 있어요. 그 운동성. (중략) 시차는 제가 몸을 통해 얻은 것인데, 외국 여행을 갔다 오면, 몸을 통해서 공간과 시간을 건너고 넘어서는 느낌이 들거든요. 시차時差가 주는 시차視差가 발생하는 거죠. 그 순간에 매우 강렬한 포에틱이 발생해요.”(김경주)

“시는 5편을 쓰면 5개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라서 질리지 않아요.”(김승일)

“시는 벽이 있어서 더 알아야 할 것 같은 글인 거죠. 남도 중요하지만 자기 시에 감동할 수 있는 순간이 가장 중요해요.”(박성준)

투수의 구질은 몇 가지로 국한된다. 그러나 구속, 구위, 구력은 무한하다. 시도 그렇다.

그들은 시로 문학을 하는 것이고 저는 사회학을 하는 겁니다.

“게으름 피우지 마세요. 왜냐하면 게으르면서 동시에 호기심을 가질 수는 없거든요.”(강경화)

“시는 속에 있는 타자가 나와서 말을 해야 하는데, 학자들은 초자아가 강해서 타자가 나와서 시를 쓰기 어려워요.”(황현산)

“시는 우리 자신과 언어의 대화예요. 그러니까, 언어가 하려는 얘기를 귀담아들어야 해요. 언어는 너무 중요해서 늘 잊혀요. 작가는 언어를 배려해주는 사람이에요.”(이성복)

“호프트Hooft라는 네덜란드 시인은 사랑했던 연인을 잃은 뒤 비문을 쓰면서 첫줄은 네덜란드어로, 다음은 라틴어로, 그다음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다시 라틴어, 이탈리아어, 마지막으로 다시금 네덜란드어로 썼다고 한다. …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철학자 앙뚜안 베르만은 ‘자신의 글을 수많은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쳐여만’ 모국어로 자기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비평의 시는 용어가 아니라 통찰에 있다. 발견은 정보가 아닌 것이다.

“풀냄새라고 있지요? 풀을 베었을 때 나는 냄새. 사람들은 그것을 상쾌하고 신선하다고 여기지만, 실은 베인 풀이 옆의 풀에게 경고하는 게 풀냄새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옆의 풀이 도망칠 수 있겠어요?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그럼에도 경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문학이요 시 아닐까 싶어요.”(이성복)

May 5, 2017: 7:09 pm: bluemosesErudition

칭의는 영원한 묵과요, 성화는 부단한 청구다. 구원은 선승구전.

May 1, 2017: 2:07 pm: bluemosesErudition

내 생각에 박(영선) 목사의 신학은 칭의와 성화를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박 목사에 의하면 칭의는 인간의 그 어떤 공로로도 가능하지 않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며, 따라서 여기에 필요한 인간의 책임은 믿음뿐이지만, 성화는 하나님도 어떻게 도와 줄 수 없는 오직 인간 자신이 책임져야 할 대목이라는 것이다. 그가 볼 때 한국교회는 이 두 사태, 즉 칭의와 성화를 확실하게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온갖 문제가 발생했다. “예수를 믿는 신자들 중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과 구원 얻은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이 성화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시는 이 구원에 있어서 칭의란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고 받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사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입니다.”(<의와 영광>, 94쪽)

평신도들은 눈치 채기 힘들겠지만, 칭의는 하나님의 소관이고 성화는 사람의 책임이라는 박 목사의 발언은 매우 위험한 이원론적 발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단정한다. “주님은 우리 대신 싸우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싸울 싸움입니다. 여기가 성화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거리입니다. 여러분은 이 성화를 기도해서 얻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노력하고 연습하고 훈련하셔야 됩니다.”(<의와 영광>, 109쪽) 이런 진술은 그의 설교에 지천으로 널려있는데, 그가 성화를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해야 할 어떤 지경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칭의와 성화에 이르는 길이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칭의는 단지 우리의 믿음에 의한 것이지만, 더 정확하게 그의 신학적 뉘앙스를 살려서 설명한다면 사람이 믿어서 칭의를 얻고 구원받았다기보다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믿게 된 것이지만(<의와 영광>, 72쪽), 성화는 우리의 구체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는 말이다. 철저하게 이원론적이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종교개혁자들과 칼 바르트에게 이르기까지, 어떤 점에서는 조직신학 전반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학자들에 따라서 칭의와 성화를 정확하게 구분하기도 하고, 어느 한쪽에 더 큰 무게를 두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신학사를 거칠게 요약한다면, 마틴 루터는 칭의에 무게를 둔 반면에 칼빈은 성화에, 그리고 바르트는 양쪽에 같은 무게를 두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는 법적인 차원의 칭의와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살아야할 실천적 차원의 성화를 구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박 목사처럼 칭의와 성화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한 정통 신학자는, 내가 아는 한 하나도 없다. 구분은 하지만 이원적으로 분리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잘못 보았다면 누구든지 한수 지도를 바란다. 미리 한 마디 밝힌다면 신학적으로 약간 예민한 이런 주제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아래의 책들을 다시 한번 들추어보았다. 칼 바르트의 <義認과 聖化>, 게르하르트 에벨링의 <신앙의 본질>, 하인리히 오트의 <신학해제>, 한국신학연구소 편 <하나인 믿음>,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3>, 이신건 <조직신학입문>. 박 목사 덕분으로 이번에 기초신학을 다시 공부한 셈이다. 이 문제를 가능한 요약적으로 정리해보자.

칭의와 성화는 기독교 신학 안에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의 현실을 언급하고 있는 신학적 개념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은혜로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이지 박 목사의 주장처럼 우리의 노력으로 성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 때문이지 그것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분리되기 때문은 아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박 목사가 혼란을 일으킨 것 같다. 즉 그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인식론적 구분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함으로써 존재론적 분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한국교회에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인식론과 존재론의 차이를 예민하게 식별하지 못함으로써 벌어지는 신학적 과오는 적지 않다. 구원, 하나님 나라, 삼위일체, 종말론 등등, 거의 모든 주제가 이에 해당된다. 약간 길지만 우리가 깊이 음미할만한 칼 바르트의 신학적 명제를 몇 대목만 간추려보겠다. 바르트는 칭의와 성화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천명한다.

“義認은 지금 여기의 아직 제거되지 않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묵과이다. 聖化는 이런 죄 안에 있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청구이다. / 義認의 은혜는 우리의 삶이고 聖化의 은혜는 죄인으로서 우리의 죽음이다. / 하나님의 죄인-사랑의 역사에 있어서 義認은 영원한 측면이고 聖化는 시간적 측면이다. / 동일한 하나님의 엄숙성으로써 義認의 은혜는 우리를 크고 절대적인 결정 안에 세워놓고 聖化로서의 은혜는 신앙과 복종의 작고 상대적인 결정 안에 세워 놓는다. / 의롭다 인정된 죄인의 신앙과 聖化된 죄인의 복종은 동일한 방식으로 서로 자비에 대한 찬양이고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리의 인정이다.”(<義認과 聖化>, 17-48쪽)

박 목사는 정통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신앙적 오류에 빠졌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비판의 화살은 곧 자기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칭의와 성화를 존재론적으로 분리함으로써 결국 이원론에 빠져들고 말았다. 바로 이 순간에 박 목사는 “내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고 둘러댈지 모르겠다. 기도, 전도, 회개 같은 종교적 현상에 머물러서 실제적인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의 문제점을 강조한 것뿐이라고 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성화가 칭의와 달리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할 어떤 상태인 것처럼 명시적으로 발언한 내용들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 건전한 신학을 심층적으로 공부한 분이라고 한다면 성화의 과정에 신자들의 회개와 믿음이 필요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발언을 결코 취소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발언들은 목회적 필요에 의해서 우연하게 나온 게 아니라, 그의 신학적 확신, 따라서 신학적 오류와 한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