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되는 것은 비판으로서의 비판[해석학적 순환]이 아니라, 사태를 들추어 내고 이해를 끌어내는 작업으로서의 비판[본질을 향해 육박해 들어가는 해석학적 순환]이다.” cf. 돌아가는 여행
“문제가 되는 것은 비판으로서의 비판[해석학적 순환]이 아니라, 사태를 들추어 내고 이해를 끌어내는 작업으로서의 비판[본질을 향해 육박해 들어가는 해석학적 순환]이다.” cf. 돌아가는 여행
the Roots of 386’s conservatism
“자유란 관념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인간의 욕망보다 강한 권력은 이 세상에 없는 모양입니다.”(p.236)
“광주항쟁은 1980년대에 이십대를 보낸 사람들을 거의 대부분 우연한 존재로 바꿔버렸다. 그걸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생들은 스스로 학습을 시작하고 조직을 만들었다. … 이제 마르크스가, 레닌이, 모택동이, 김일성이 닥치는 대로 읽히게 됐다. 누군가는 그들에게 이게 우연한 세계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했는데,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이전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책들이 증언하기 시작했다.”(p.347)
“그는 이런 문장을 외웠다.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에 주어져 있으며 인간의 감각에서 독립해 존재하면서 인간의 감각에 의해 복사되고 촬영되고 묘사되는 객관적 실재를 표시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다.” 그는 또 이런 문장을 외웠다. “세계에는 운동하는 물질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또 운동하는 물질은 공간과 시간 밖에서는 운동할 수가 없다. 세계는 하나이며 물질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세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대답이다.” 또 이런 문장을 외웠다. “물질세계는 발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로 연관된 통합적 전체이기도 하다. 물질세계의 모든 대상들과 현상들은 자력으로 또는 따로따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 속에서 또는 다른 대상들 및 현상들과의 통일 속에서 발전한다. 이들의 각각은 다른 대상들과 현상들에 작용을 가하며, 스스로도 이 상호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또 이런 문장을 외웠다. “사람만이, 오직 사람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 사람은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자주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인 자주성을 지니고 자기 운명의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규정한다.” … 그 어떤 폭압적인 체제도 자신의 존재를 쉽게 없앨 수는 없는데, 그 까닭은 자신의 운명이 의식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저 거대한 세계와 얽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p.353~354)
“폭력이 몸에 밴 사람은 폭력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하지 못함’이 그가 속한 세계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그런 세계에서는 제아무리 비폭력을 주장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그들의 몸은 폭력보다 비폭력을 더 불편해한다.”(p.102)
“당시에는 미처 자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부터 분신정국이 펼쳐졌던 1991년까지 사 년에 걸쳐, 그동안의 한국사회를 완강하게 지탱해온 뭔가에 불길이 지펴지면서 그 불꽃이 화려하게 타올랐다가 장엄한 모습 그대로 몰락해갔다. 그게 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 그리하여 그들이 목도하게 된 것은 일찍이 황지우가 시 <이준태(1946년 서울生, 연세대 철학과 졸, 미국 시카고 주립대학 졸)의 근황>에서 쓴 것과 같이 “그리고 大腦와 性器 사이”의 세계였다. 대뇌와 성기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대뇌는 대뇌끼리, 성기는 성기끼리 서로 피곤할 정도로 싸우던 시절은 끝이 났다. “그리고 대뇌와 성기 사이”의 세계에서는 개인들이 저마다 한 시대의 몰락을 주관화하고 내면화시키면서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말은 곧 한 시대의 상처가 각 개인의 내면, 그러니까 대뇌와 성기 사이에서 치유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뜻했다. 그 시점부터 대외의 언어와 성기의 언어가 혼재하기 시작하다가 한동안은 성기의 언어만이 사회를 휩쓸었다. 이 사실은 1992년부터 라캉 유의 정신분석학이나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과 베르나르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따위의 영화가 크게 유행한데서도 잘 알 수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마광수 교수가 1991년 발표한 <즐거운 사라>로 구속된 것도,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라고 노래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것도 바로 1992년의 일이었다. 1991년 5월 이전까지만 해도 대뇌의 언어로 말하던 사람들이 1992년부터 모두 성기의 언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1991년 5월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내면 풍경이었다.”(p.47, 49)
“그제야 나는 그즈음 내가 공들여 지어온 집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반석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 순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자각은 그해 6월, 나를 향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밀려들던 우울(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나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우울이 아니라 한 시대 전체가 느끼던 거대한 우울이었던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 그 우울은 너무나 컸다)로부터 나를 구해냈다. 나를 구한 건 “자기 자신이 되어라”라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p.123~124)
“베르크 씨가 내게 들려준 그 연극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발리케는 군수산업으로 돈을 번 무르크와 자신의 딸 안나를 결혼시키려고 애쓰던 중, 안나가 무르크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즉시 발리케는 두 사람의 약혼식을 준비하는데, 그즈음 스파르타쿠스단이 봉기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윽고 술집에서 열린 약혼식장에는 전쟁터에 나간 뒤로 사 년 동안 소식이 끊어졌던 안나의 약혼자 크라글러가 알제리에서 돌아온다. 크라글러는 안나에게 결혼해달라고 요구하지만, 안나는 이제 자신은 결혼할 수 없는 몸이라며 거절한다. 그러면서도 안나는 뱃속에 든 아이를 떼려고 술에 후추를 타서 마신다. 거리에서는 스파르타쿠스단을 진압하기 위해 군인들이 지나가는 가운데, 로자 룩셈부르크의 군중연설과 혁명 상황에 대해 전해들은 크라글러는 사람들을 이끌고 대열의 선두에 선다. 크라글러를 찾아 헤매던 안나는 사람들을 이끌고 거리를 달려가는 크라글러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뱃속에 불륜의 핏덩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결국 안나를 이해하게 된 크라글러는 동지들의 욕설과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둘만의 행복을 찾아 떠난다. 커다랗고 하얗고 넓은 침대로.”(p.371)
– 김연수(2007).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서울: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