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소득 500만원 초과는 인적공제 대상이 아니지만, 임대소득 2000만원 이하는 해당된다. 이것이 공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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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시간을 맞춰둔 내 해밀턴 손목시계를 흘끗 보니 앞문이 내려진 것은 6시 반 지나서다. 내겐 콘탁스가 두 대 있는데 그중 하나에는 필름이 장전되어 있다. 그것들은 새 필름들과 함께 방수백으로 대충 보호되어 있다. 나는 배 바닥을 뒤덮은 토사물 더미 사이로 살살 움직인다. 주변에 비 오듯 쏟아지는 함포 사격으로 귀가 먹먹하고, 멀리는 기관총 쏘아대는 따다닥 소리가 들린다. 나는 네모상자에 달라붙는다. 찰칵. 너는 진짜로 여기 있는 게 아니야. 찰칵. 나는 거리를 어림잡아 초점을 맞추고, 두 손은 걷잡을 수 없는 경련으로 덜덜 떨린다. 찰칵. 뷰파인더에 눈을 딱 붙이고 있어, 제기랄! 이건 배 안에서 토하던, 방금 본 그 녀석이 아니야. 되밀려오는 파도에 내장이 둥등 뜬 채 흔들리는 건 그가 아니야. 찰칵.
81. 파리에서 내 생활 시간표는 뻔하다. 랑카스터 호텔이나 다른 고급 호텔 방에서 느지막이 기상, 뜨뜻하고 어여쁜 여인의 등판을 감상, 끝없이 긴 매일의 목욕, 그날 치 신문 보기, 매그넘을 위한 취재 아이디어, 선술집에서 경마지 정독, 현안에 대해 매그넘 에이전시에 전화, 가벼운 점심, 여자 만남, 롱샹 경마장에서 오후 늦게 경마 관람, 지나가다 들른 친구들과 바에서 한잔, 맛집에 가서 저녁 식사, 포커 혹은 사랑의 밤, 때론 이 둘 다. 나는 갓 마흔이고, 이렇게 쾌락주의자의 가면을 쓰고는 있지만 내심은 의문에 시달리고 있다. 남은 일생 무엇을 할 것인가? <홀리데이>의 요청을 받아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는 이 노릇을 계속해? 도박에서 잃은 돈을 메꾸려고 돈을 좇아 뛰어다녀? 애착도 미래도 없는 여자들과의 만남을 이어가? 아침마다 카파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기엔 가면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 이제 비우는 술잔마다 게르다의 부드러운 얼굴이 어른댄다.
_ 플로랑 실로레, <로버트 카파, 사진가>, 포토넷, 2017.
“PSA는 암의 진단법이 아닙니다. 전립선 암을 확인하기 위한 표준진단법은 전립선 조직을 소량 채취하여 현미경으로 비정상 세포를 확인하는 전립선 조직검사입니다.” “총 PSA 수치가 10.0 ng/mL 이상 시에는 전립선암 위험도가 증가합니다(미국암학회에 따르면, 67% 이상).”
“They found dust grains within the space rock - which fell to Earth in the 1960s - that are as much as 7.5 billion years old. The oldest of the dust grains were formed in stars that roared to life long before our Solar System was born.”
박상우(2018). 『롤랑 바르트, 밝은 방』, 커뮤니케이션북스.
ⅹ~ⅺ. 이 책은 사진이라는 현상을 다룬,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진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hotographie)”이다. … 그는 인류 역상에서 완전히 새로운 매체인 사진을 마주하며 끊임없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인간으로 자신을 설정한다. 그는 결국, ‘현상학적 방법(la méthode phénoménologique)’을 통해 “나의 의식이 사진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한다.
ⅻ. 바르트는 사진을 통해 사랑과 죽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죽음을 통해 사진을 말했다.
ⅹⅳ. 그는 사진 앞에서 느끼는 이 같은 자신의 감정의 실체를 대립되는 두 감정, 즉 일반적인 흥미의 감정을 지칭하는 ‘스투디움’과 외상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지칭하는 ‘푼크툼’으로 나누고, 이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말했다.
ⅹⅴ. 그는 “나는 이제부터 쾌락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랑과 죽음이라 낭만적으로 부를 수 있을 그 무엇과 관련해서 사진이 지닌 본질의 명백성을 탐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결국 책 전반에서 쾌락, 사랑, 죽음을 통해 사진의 특수성을 밝히려 했다.
1. 사진은 지시체를 덮고 있는 투명한 봉투이며, 비가시적이다.
2.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관해 전개한 논의의 핵심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시체’라는 개념이다. 『밝은 방』의 서론에 해당하는 1장에서, 그는 한 장의 사진에 촬영된 지시체를 통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 지시체란 바로 나폴레옹 황제를 본 동생 제롬의 눈이다. “황제를 본 눈을 나는 본다.”
3~4. 사진과 지시체는 이 둘이 파괴되지 않고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완벽히 결합된 오브제다. 그것은 바르트의 표현대로 유리창과 풍경, 선과 악, 욕망과 욕망의 대상처럼, 머릿속에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분리해서 지각할 수 없는 이원성과 유사하다. … 이런 점에서 사진은 ‘동어반복적인’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7. 바르트는 예컨대 1960년대 부르디외가 주도한 ‘일군의 사회학자들 그룹’이 가족사진을 분석했던 사회학적 관점을 격렬히 비판했다. 그는 가족사진이 가족이라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통합 프로토콜일 뿐이라는 그들의 주장을 부정했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이들의 글을 포함해 사진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진인 가족사진을 항상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종류의 사진을 보면 볼수록 사진에 관한 기존 연구들에 화가 난다고 고백했다. “나는 지시체, 즉 욕망하는 대상, 사랑하는 신체만을 보기 때문이다.” 바르트에게 가족사진은 가족 체제를 공고히 하는 사회적 통합 수단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록해 보여 주는 보물 창고였던 것이다. 바르트는 결국 사진에 관한 모든 학문적ㆍ과학적 연구들을 배제하고 사진에 재현된 지시체만을 보려 했다. … “나는 [사진에서] 지시체만을 본다.”
15. 보는 자의 입장을 선택한 바르트는 결국 ‘감정’을 통해서만 사진에 관심을 가질 뿐이라고 고백한다.
17. 바르트를 사로잡은 사진들은 모두 ‘이원성(dualité)’이라는 구조적 법칙을 가진다. 이원성이란, 의미가 서로 연결되지 않은 두 요소다. 바르트의 감정을 덜 건드리는 사진에는 동질의 요소들만으로 이루어진 일원성이 존재한다. 스투디움은 문화에 바탕을 두고 익숙하게 체험하는 평균 정서다. 푼크툼은 감정에 구멍이나 상처를 내는 정도의 정서적 충격이다. 스투디움은 좋아하기, 푼크툼은 사랑하기에 상응한다.
20~21. 그는 이런 평균의 감정을 라틴어로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명명했다. ‘studium’이라는 용어는 어원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전념’, ‘누군가를 좋아함’, 혹은 ‘열렬하지만 특별히 날카롭지는 않은 일반적인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바르트는 바로 스투디움을 통해, 정치적ㆍ역사적 사진을 포함한 많은 사진에 흥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21. 스투디움의 경우, 보는 자인 나의 눈이 사진에서 그것을 찾으러 간다. 혹은 바르트의 표현대로 “나의 최고의 의식을 스투디움의 영역에 부여한다”(Barthes, 1980: 49). 하지만 두 번째 요소의 경우, 나의 의식이 사진에서 그것을 찾으러 나선 것이 아니라, 사진 속에 있는 그 요소가 마치 화살처럼 출발해 나를 관통한다. 바르트는 이 두 번째 요소를 라틴어를 사용해 푼크툼(punctum)이라고 명명했다. ‘punctum’은 원래 찔린 자국, 작은 구멍, 작은 얼룩, 작은 베인 상처를 의미한다. 그것은 모두 날카로운 도구에 의해 생긴 상처 혹은 마크를 지칭한다. 사진에서 푼크툼은 사진 내부에서 그 사진을 보는 주체인 나를 찌르는 어떤 것이다.
22. 스투디움은 우리가 사진 지시체(인물ㆍ사물ㆍ풍경 등)에 지니는 반쯤의 욕망, 반쯤의 의지 혹은 막연한 관심에 속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좋다(bien)’라는 감정이다. 스투디움의 균일한 공간에 가끔씩 전혀 예상치 못한 요소가 존재한다. 바르트는 이 요소의 존재 자체가 그의 사진 읽기를 통째로 바꿔 놓는다고 말한다. 이 요소는 바로 나를 찌르고, 상처를 유발하는 푼크툼이다. 바르트는 푼크툼이 ‘좋아하기’가 아니라 ‘사랑하기’라고 강조한다. 푼크툼은 무엇에 대한 일반적 흥미가 아니라 충만한 욕망, 강력한 의지 혹은 심오한 사랑이다. 그것은 깊이 파인 상처다.
25. 피사체 몰래 포착한 사진은 보는 자에게 충격을 준다. 사진은 또한 무엇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뛰어난 풍경은 방문이 아니라 거주 욕망을 유발한다.
26. 롤랑 바르트는 스투디움을 ‘문화적 측면에서 자신에게 쾌락을 주는 감정’이라고 정의한다. 어떤 경우에 그는 사진에서 스투디움을 경험할까? 바르트는 사진이 지닌 다양한 기능들을 통해 그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 기능들이란 총 다섯 가지로 정보의 기능, 재현(예술)의 기능, 충격의 기능, 의미의 기능,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이다.
31. 대부분의 보도 사진은 보는 자에게 쇼크를 주지만 심적인 교란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것은 외칠 수 있지만 상처를 줄 수는 없다. 이 사진은 바로 수용되지만 그것이 전부일 뿐이다. 그는 잡지나 신문에서 이 사진들을 뒤적거리긴 하지만 기억하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그 사진에는 그의 사진 읽기를 방해하는 디테일이 일절 부재하다.
31~32. 바르트에게 단일하지 않은 사진이란 어떤 종류의 것일까? 그것은 이 같은 균질한 공간에 보는 자의 눈을 사로잡거나 보는 자의 심장을 찌르는 어떤 이질적 요소가 존재하는 사진이다. 그 요소가 바로 ‘푼크툼’이다.
33. 푼크툼은 비의도적이다. 사진을 보는 자가 사진가의 의도성을 느낄 때는 오직 스투디움만 경험한다. 푼크툼은 우연히, 불가피하게 주어진 것이다. 푼크툼은 천천히 주어지지 않고 단번에 나타나는 것으로, 사토리나 하이쿠와 유사하다.
34. 바르트는 『밝은 방』 19~23장에 걸쳐 총 다섯 가지 종류의 푼크툼을 제시한다. 그것은 “부분적 특징”(19장), “비의지적 특징”(20장), “사토리”(21장), “사후에 그리고 침묵”(22장), “가려진 시야”(23장)다.
37. 바르트는 보는 자가 사진가의 의도와 만나는 것은 스투디움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한다. 사진에서 어떤 디테일이 자신을 찌르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사진가가 그 디테일을 의도적으로 사진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38~39. 푼크툼은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다가오는 하나의 섬광이며 감정의 급격한 변화다. 그는 이 같은 종류의 푼크툼을 일본 선불교의 용어를 빌려 ‘사토리(satori)’라고 지칭했다. 사토리란 선불교의 ‘명상을 통한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의미한다. 푼크툼도 사토리와 마찬가지로, 차례대로 전개되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발생한다. 푼크툼은 그의 표현대로 ‘발전시킬 수 없는(indéveloppable)’ 어떤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바르트는 푼크툼이 일본의 짧은 시 형식인 하이쿠(俳句)와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 바르트는, 푼크툼과 하이쿠에는 외부로 퍼져 나가려는 확장성 대신 오직 ‘생생한 부동성(immobilité vive)’이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39~40. 스투디움만 존재하는 사진을 바라볼 때 관객의 몸짓은 게으르다. 사진을 대충 넘기거나, 빨리 혹은 무기력하게 보거나, 늑장 부리거나 서두르면서 본다. 하지만 푼크툼을 바라보는 몸짓은 순간적이고 능동적이다. 푼크툼에 찔린 관객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웅크린 야수’로 변한다.
42. 바르트에 따르면, 사진에 있는 어떤 요소(기호)에 보는 자가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면 그 요소는 스투디움의 영역에 머문다. 반대로 사진에서 이름을 부여할 수 없는 요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요소는 푼크툼에 해당한다.
50~51. 회화나 언어로는 인간(화가나 문필가)이 실제로 보지 않고도 지시체를 재현할 수 있다. 게다가 재현된 지시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있지만 가공의 산물, 즉 동화나 신화 속 인물ㆍ동물인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사진에서는 카메라가 직접 ‘봐야만’ 지시체를 기록할 수 있다. 사진의 지시체는 언제나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사진 지시체의 이 같은 실재성에서 하나의 확실한 결론에 도달한다. 사진에 재현된 사물은 언제나 그곳에 실제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바르트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이 같은 결론에서 ‘그것이-존재-했음’이라는 그의 유명항 사진 테제를 이끌어 낸다. 그리고 이 테제를 사진의 본질ㆍ보편성ㆍ특수성으로 규정한다.
53~54.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이 ‘그것이-존재-했음’이기 때문에, 사진은 다른 매체가 지니지 못한 ‘인증’의 힘을 지닌다고 말한다. … 언어는 사진과는 달리 결코 인증의 힘을 가지지 못한다. 언어는 근본적으로 픽션에 속하기 때문이다. 언어를 ‘논픽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장치(논리, 선서 등)가 필요하다고 바르트는 역설한다. 하지만 그는 사진은 이 같은 모든 인증 장치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사징느 바로 인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57. 시간의 푼크툼은 사진 속 인물이 ‘곧 죽을 것’(과거 속 미래)과 ‘이미 죽음’(과거완료)이라는 다른 시간대의 중첩에서 발생한다.
59. 바르트는 이 감정이 영화를 관람할 때 느끼는 것과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영화를 볼 때 실제로 이미 사망한 배우가 영화에 등장하면 일종의 멜랑콜리를 항상 느낀다고 말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바르트에게 다가오지만, 바르트는 그 배우가 실제로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66. 사진의 특수성을 지시체의 특수성에서 찾은 바르트는 『밝은 방』의 말미(44장)에 이 책의 제목이 왜 ‘밝은 방(La chambre claire)’, 라틴어로 ‘카메라 루시다’인지 암시적으로 설명한다. 바르트는 먼저 “사진의 기술적 기원 때문에 [사진을] 어두운 통로(camera obscura) 관념과 연결시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우리는 밝은 방을 언급해야 한다(Barthes, 1980: 164)”고 주장한다.
68. 사진은 ‘깊고 심오한’ 것이 아니라 ‘얇고 평평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진을 깊이 파고들 수도 꿰뚫어 볼 수도 없다는 이 법칙을 따라야 한다”(Barthes, 1980: 164)고 고백한다.
70. 한 장의 사진을 내가 아무리 오랫동안 보아도 사진은 나에게 더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기 때문에, 즉 ‘해석이 중지’되기 때문에 사진에서 대상의 보임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것이다. “바로 해석의 이와 같은 정지 속에 사진의 확실성이 있다”(Barthes, 1980: 165).
71~72. 바르트에게 사진은 깊이가 없고 두께가 없는, 얇고 평평한 것이다. 한마디로 사진은 밝은 것이다. 사진이 그에게 밝은 이유는 사진이 지닌 두 가지의 확실성(명백함)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확실성은 지시체의 ‘식별’의 확실성이고 두 번째 확실성은 지시체의 ‘존재’의 확실성이다. 바로 사진이 지닌 이 두 가지 확실성 때문에 바르트는 사진을 ‘밝은 방’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74~75. 바르트는 사진이 관객에게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환각(hallucination)을 유발하는 이상한 매체라고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이 같은 미지의 환각이 지각 차원에서는 가짜이지만 시간 차원에서는 진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사진은 촬영된 실재 대상과 시각적으로는 다를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시간적으로 과거에 존재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종류의 환각을 ‘분할된 환각(hallucination partagée)’이라고 지칭했다. 그 이유는, 한편에서 “사진의 대상은 지금 현재 그곳에(사진 속에) 있지 않다”라는 의식과 “그럼에도 그 대상은 분명히 존재했다”라는 의식이 관객의 마음에서 ‘분할되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이런 종류의 환각 때문에 사진을 ‘광적인 이미지’, 더 정확히 말하면 “실재가 문질러 발라진 광적인 이미지”(Barthes, 1980: 177)라고 지칭했다.
78. 바르트는 모든 예술은 문화 영역에 속하며, 따라서 날 것이 지닌 광적인 힘을 순화시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사진과 예술이 결합한 예술사진에는 어떤 광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예술사진에서는 사진의 본질인 ‘그것이-존재-했음’이 망각되어 보는 자에게 어떤 심리적 작용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79. 『밝은 방』의 결론으로, 바르트는 사진이 온순함과 광기라는 서로 모순되는 양면성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만약 사진의 리얼리즘(‘그것이-존재-했음’)이 사진의 예술화와 보편화에 의해 순화되어 약해진다면, 사진은 유순해진다. 반대로 사진의 리얼리즘이 보는 자의 의식(특히 대상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한 의식)에 지나간 과거를 현재화해 절대적으로 된다면, 사진은 광적으로 변한다. 그것은 과거의 실재를 현재화하기 때문에 사물의 흐름을 뒤바꾸는 것이며, 보는 자에게 ‘사진적인 엑스터시’를 불러일으킨다. 결국 바르트는 사진에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다. 사진을 문명의 코드에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진에서 솟구치는 완강한 실재를 정면으로 마주할 것인가. 바르트는 자신이 이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며 글을 맺는다.
0. 문자적으로는 ‘무규범’을 뜻하지만, 더 일반적으로는 적절한 규범에 대하여 실질적인 불일치가 존재하는 사회의 상태.
1. 뒤르껭은 아노미를 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 불완전하게 이동한 데에서 야기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자살론』(1897)에 따르면, 행할 가치가 있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규범 없이 내던져서 표류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살을 한다. 여기에는 행복과 질서가, 규제와 가치 합의에 의존하고 있다는 뒤르껭의 보수적 신념이 배태되어 있다.
2. 뒤르껭의 심리학적 가정은 머튼에 의해 수정되었다. 『사회이론과 사회구조』(1949)에서 그는 아노미의 의미를 무규범에서 규범 갈등으로 변화시켰다. 머튼에 따르면, 문화적으로 인정되는 목표와 그것을 얻기 위한 제도화되고 정당화된 수단 간의 분열 때문에 불행이 초래된다고 주장했다. 아노미는 사람들이 목표를 정상적인 수단에 의해 성취할 수 없을 때 발생하고, 이 경우 사람들은 일탈하여 목표와 수단 중 하나를 거부하기도 하고 둘다 거부하기도 한다. 하여, 일탈을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실패에 대한 반응’이라고 보고 그것을 [교육을 매개로] 치유해야 한다는 견해가 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