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anuary 8th, 2020

January 8, 2020: 10:19 pm: bluemosesErudition

“2002년 엔트리에서 탈락한 그는 한국 경기를 볼 수 없었다. 한 달 내내 술로 마음을 달랬다. 방황은 길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돌아봤다. 절실함, 근성, 수비 가담이 부족했다. 2004년에 국군체육부대(상무)에 입대했다. 그곳에서 절실함의 벼랑 끝에 선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만났다. 나태해지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직전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됐다. 월드컵 출전이 또 좌절됐다. 산전수전 다 겪어서일까. 웬만한 일로는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인생에서 축구는 그저 한 부분이라고 말한다.”

: 9:37 pm: bluemosesErudition

권재원.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담론2: 이른바 역량이라는 것

김은영. OECD 교육 2030 : 미래 교육과 역량

김경범. 교육청 교육과정을 만들자!

: 5:52 pm: bluemosesErudition

“자율주행 기술은 어디에서 먼저 도입될까요? 물류창고에서 시작될 거에요. 제한된 공간이니 법적인 이슈가 적어서 더 빠르게 도입되겠죠.”

: 3:13 am: bluemosesErudition

“자전거가 쓰러지려고 할 때 핸들을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틀어야 쓰러지지 않는다.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돌리면 자전거는 그 방향으로 회전한다. 이때 회전하는 자전거는 기울어지는 반대방향으로 원심력을 받는다. 이 원심력에 의해 자전거는 다시 똑바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전거에 담긴 또 다른 비밀은 핸들이 무게중심을 바꾼다는 사실이다. 자전거가 쓰러지는 것은 두 바퀴가 땅에 닿는 2개의 점을 연결한 축을 중심으로 자전거 전체 무게가 평형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핸들이 조정하는데 넘어지려는 쪽으로 핸들을 돌리면 무게중심이 반대쪽으로 이동해 넘어지려는 것을 극복하고 다시 평형을 이루게 된다.”

: 2:34 am: bluemosesErudition

7~8. 파커 파머는 놀랍게도 우리의 피로감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흑인인권운동의 가장 감동적인 싸움 중 하나였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만들어낸 로자 파크스Rosa Parks의 결정을 그 예로 든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는 그만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 버스 앞쪽의 백인 전용 좌석에 앉은 것이다. 그것은 엄연히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위험하고 대범하며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여러해가 지나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어떤 대학원생이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날 당신은 왜 버스 앞자리에 앉았나요?” 로자 파크스는 사회변혁을 꾀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진 않았다. 그녀의 동기는 아주 단순했다. “피곤했거든요.” 하지만 피곤한 건 그녀의 몸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영혼이, 그녀의 마음이, 그녀의 존재 전체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규칙에 놀아나는 것에, 그녀 영혼이 주장하는 자아를 부인하는 것에 피곤해졌다는 의미이다.

11. 치유공간 ‘이웃’은 … “제대로 울 곳조차 없는 이들을 위한 장소예요”라고 소개하던 선생님의 따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참 섬세하고 시적인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어진 설명은 이러했다. 아이를 잃고 집에 돌아온 밤, 부모가 통곡을 하니 옆집에서 따라 울었다. 밤마다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다 100일쯤 지나자 옆집에서 신고를 했다. 야박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12. 이야기를 듣고 원고를 정리하는 내내 나는 영국 시인 로버트 그레이브스Robert Graves의 시를 떠올렸다. 1차 대전에 참전한 후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던 이 시인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연애시를 쓴 적이 있다. “사랑하라, 희망 없이, 마치 젊은 새잡이가 / 지주의 딸에게 자기의 높은 모자를 휙 벗어 날려보내듯이 / 그리하여 감금되었던 종달새들이 도망쳐 날아오르게 하라 / 그녀가 말 타고 지나갈 때 그 머리 주위에서 노래하도록”(사랑하라, 희망 없이)

19. “지상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이사 가든 천사들이 우리 옆집을 빌릴 테니까.”(에밀리 디킨슨)

22. 유가족들이 마사지를 받으면서 하는 말이, 만져주니까 눈물이 난다는 거예요.

27. 밤 열한시에 여자아이가 혼자 불 꺼진 교실에 앉아 있다는 게 상상만 해도 무섭잖아요. 아이라고 왜 안 무섭겠어요. 그런데 그 아이에게는 무서움을 뛰어넘는 다른 더 강한 감정이 있는 거예요. 그리움이라는 감정이요.

28. 예전에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라는 허수경 시인의 시구를 열심히 외우고 다니면서 슬픔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었는데,

28~29. 이런 심리학 실험이 있어요. 사람들을 두 집단으로 나눠서 영화를 보여주는데, 한 집단은 영화를 끝까지 다 보여주고 다른 집단은 영화가 끝나기 직전에 갑자기 멈춰요. 그리고 몇 달 뒤에 사람들에게 그때 본 영화에 대해 물어봅니다. 그럴 때 어떤 집단이 영화에 대해서 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물론 결말을 못 본 집단이에요. 왜 그럴까요? 영화의 결말을 본 집단은 욕구가 해소되었으니까요. 해소된 욕구는 더 이상 욕구가 아니에요. 배가 고팠던 사람이 밥을 먹고 나면 배고픈 욕구는 사라지는 거잖아요. 이처럼 욕구가 충족되면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데 충족이 되지 않은 욕구는 계속 남아있는 거죠. 모든 인간은 완료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 누군가와 갑작스럽게 이별을 하는 경우처럼 갑자기 죽음과 관련한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으면, 잊어야 한다,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잊어지지 않아요. 그러니 완료되지 않고 중간에 툭 끊어진 그 욕구를 마음 안에서 충분히 완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슬픔의 경험, 이 고통의 느낌으로부터 떠나갈 수가 있어요.

32~33. 어린 시절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때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가다가 넘어지려고 하면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으라고요. … 너무 슬플 때는 슬픈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슬퍼야 할 때 슬프지 않으려 하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47. 아이가 자기 언니가 찾아왔다고 느끼는 것은 하고 싶은 심리적 작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경험, 그 존재, 그것과 대면하는 시간, 그 순간을 막으면 안 돼요. 당연히 보일 수 있고 들릴 수 있고 꿈에 계속 나타날 수 있죠. … 정지용 시인의 시 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얼굴 하나야 / 손바닥 둘로 / 폭 가리지만 // 보고픈 마음 / 호수만 하니 / 눈 감을 수밖에”(<호수>)

47~48. 사고로 다리를 절단하거나 팔을 절단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마취에서 깨어나면 절단해서 없어진 손가락 끝이 무지하게 아파요. 손가락이 없는데도 수개월 또는 수년 동안 통증을 느낍니다. 물리적으로는 하루아침에 절단되어버렸지만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몇 년이 진도 몸에 붙어 있는 거죠.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적으로 종료되었다고 당장 딱 끊어지는 게 아니에요.

59. 트라우마는 ‘뚫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τιτρώσκω’에서 파생된 말이다. 전쟁터에서 방패를 뚫을 만큼 강력한 외부 자극이 만들어낸 마음의 상처라는 뜻이다. … “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덴마크 소설가 이자크 디네센이 한 말이라고 한다. 유대인으로서 동족이 학살당하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겪었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책에 인용하면서 유명해진 말이다. 캐시 캐루스와 같은 트라우마 전문가도 트라우마란 소화되지 못한 기억의 파편들로서 이것이 사건을 겪은 이의 정신 속에 흡수되고 언어화되어야만 치유가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물론 이야기는 슬픔을 가져온 과거의 사건을 완전히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 슬픔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60. 흔히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하잖아요. 그럴 때 말하는 아픔은 스트레스예요. 하지만 트라우마는 스트레스와 달리 아픈 만큼 파괴되는 것이에요.

61. 트라우마는 삶의 전반적인 판이 다 깨어지는 거예요. … 트라우마라는 것은 통제 가능한 영역 바깥에 있는, 인간의 의지나 한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63. 로버트 그레이브스라는 영국 시인이 있습니다. 무척 신비롭고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인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돌아온 뒤로 일생 동안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을 받았어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늘 자신이 참호 속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하고요. 자정이 되면 자신의 침대 위에서 폭탄이 터지고, 대낮에 거리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의 얼굴에서 죽음을 당한 동료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또 힘이 좀 나는 것 같은 날에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언덕을 찾아가는데 거기도 미래의 전쟁터로 바뀌었다…… 전쟁이 끝난 뒤 출판한 자서전 <모든 것과의 이별>에서 이렇게 고통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64~66. 트라우마의 핵심은 죽음 각인이에요. 고부간의 갈등 같은 스트레스와 달리 성폭행이나 쓰나미, 전쟁 같은 트라우마는 거의 죽음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경험이기 때문에, 죽음이 생애 어느 순간보다 생생한 리얼리티로 각인되는 거예요. 한비야 선생님이 쓰나미 때문에 인도네시아에 급파되어서 수많은 시체들이 널브러진 광경을 처음 접하고는 ‘아, 나는 이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라는 강력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잖아요. 그게 죽음 각인인 거죠. … 죽음이 온몸, 온 세포에 스며드는 경험을 하는 것이 트라우마입니다. 세월호 생존학생들은 배에서 빠져나오는 그 짧은 시간, 또는 생사가 갈린 그 찰나의 경험이 이후에도 계속 반복돼요. 죽음을 코앞에 둔 생명은 본능적으로 온몸의 세포가 하나도 빠짐없이, 백 퍼센트 각성상태가 되거든요. 그건 우리가 시험을 볼 때 긴장감을 느끼는 그런 정도의 각성상태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에요. 그보다 더 생생한 순간은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어요. 그러니까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에게는 그것만이 현실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순간이 계속 생생하게 떠오르죠. … 그 상태로, 그 경험을 중심으로 시간이 멈춰버려요. 가족대책위원회 대변인인 예은이 아빠가 페이스북에 ‘오늘은 154번째 4월 16일입니다’라고 했죠. 그건 문학적인 수사가 아니에요. 그분들은 정말로 그래요. 단원고 아이들이 4월 18일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잖아요. 어떤 희생학생 누나가, 빨리 4월 18일이 되면 좋겠는데 4월 16일에서 시간이 안 간다고 해요. 이게 트라우마의 핵심입니다. 그 순간 삶이 정지하는 거예요.

66. 그러니까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은 고통의 러닝머신 위를 계속 뛰는 셈이네요. 멈출 수도 없고 내려올 수 없고요.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멀어져보려고 하는데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니까.

78~79. 잘 아는 어떤 5.18 피해자분이 있는데, 그분이 5.18 때 고문당하고 감옥에서 10여년을 살았어요. 지금은 간신히 사회생활을 조금씩 하는 정도고요. 그분이 평소에 트위터를 한 달에 한두 개쯤 하고 있었는데,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나서 갑자기 하루에 30여개씩 매일 올리는 거예요. 그 내용이 다 친구들 만나서 밥 먹은 이야기, 술 마신 이야기, 노래방 간 이야기예요. 제가 그걸 보고 걱정이 돼서 전화를 했더니 그분이 뭐냐고 하느냐면, 사람들이 가증스럽다는 거예요. 자기가 이십대 때 5.18을 겪으며 고문당하고 10여년을 감옥에서 살면서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어린 학생들이 몇명 희생됐다니까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데 그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글을 올리면서 엇나가는 거죠. 트라우마가 치유가 되지 않으면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피해자가 다시 주변 사람들에게 깊숙이 상처를 주게 되고, 그래서 또 주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게 되고, 그러다보면 더 비뚤어지고 악해지는 거죠. 그래서 트라우마를 치료받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아진다는 것은 굉장히 끔찍한 일이에요. 말하자면 냉혈한을 양성하는 거죠. 결국은 그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 비용을 우리가 다 치러야 하는 거예요. 상처 입은 개인을 혼자 내버려두면 상처가 계속해서 번져나가니까요. 그러니까 트라우마를 치유하는데 우리 사회 전체가 나서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79. 예전에 소설가 김연수 씨와 대담을 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김연수 씨가 작품을 처음 쓰는 소설가 지망생들이 주인공을 ‘종이인물’로 만드는 실수를 자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 종이인형처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닌, 정말 생생하게 느끼고 움직이는 존재를 그리기 위해서 작가는 잘 살펴보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81. 어떤 거대한 트라우마가 생겼고 그 트라우마 사건의 명백한 가해자가 있어요. 그런데 그 가해자가 나와 너무 멀리 있고 압도적인 힘을 가진 경우에는 피해자들 안에서 서로 상대적인 가해자를 찾는 일종의 심리 게임이 발생해요. 형수와 큰형이 내 자식을 돌봐주지 않은 것, 어려웠을 때 내가 도와준 이모가 바로 옆 동네에 사는데 내가 감옥에 가자 자기 자식들을 내 집에 발도 못 들이게 한 일, 그런 일들이 사무치는 거죠. … 피해자들끼리 상대적인 가해자를 찾는 상황에 빠지다보면 실질적인 가해자는 시야에서 싹 사라져요. 피해자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물어뜯으며 증오하다가 모두가 망가져요.

84. 진짜 가해자는 너무 멀고 내 분노를 전혀 받아주지 않으니까,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 중에 분노를 풀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객관적으로는 너무 고마운 사람인데도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분노를 표출하는 거예요. … 그 사람이 나보다 조금 형편이 낫다는 사실이 분노의 원인이 되기도 하죠.

86.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정도(심리적 거리)에 따라, 그 죽음을 얼마나 가까이에서 목격했는지의 정도(물리적 거리)에 따라 죄의식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그 죽음에 대한 실질적 책임과는 별 관계가 없어요. 사실 그 노조원의 죽음에 현실적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가족이나 노조원들보다 죄의식이 적을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죄의식이 크다면 그건 그 사람과 각별했거나 그 사람을 무척 아꼈다는 증거다’라고 말해줬어요. 그랬더니 그 이야기를 듣고 노조원들이 안심하는 거예요.

88. 이명수 선생에게 들려줬더니 ‘PTSD의 죄의식은 정말 창의적이구나’라고 해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만들어서 죄책감을 갖는 거예요. … 정작 죄의식을 가져야 할 사람들은 하나도 안 갖는데 말이죠.

93. “우리가 삶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은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마구 울기 시작한다.”(릴케, <맺음시>) 릴케는 또다른 시에서 죽음은 우리의 삶과 함께 자라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95. 정신과에는 수백 가지의 질환이 있어요. … 그런데 유일하게 내인성이 아닌 외인성 질환이 있어요. 그게 바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즉 트라우마예요. 트라우마는 외적 사건이 근본 원인인 병입니다. 개인 내면의 갈등 때문에 생긴 게 아니란 거죠. 그래서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서는 근원적 요소인 외부 요인에 대한 명명백백한 정리가 먼저 필요해요. 이 거대한 분노와 억울함의 진원지에 대한 명확한 규명 없이 개인 내면만 치유하면 된다는 건 언어도단이에요.

103. 파커 J. 파머의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의견에 강한 차이가 생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기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악마화하는 것이 문제라는 거예요. 그게 영혼의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큰 걸림돌이라는 거죠. … 파머는 민주주의를 살아남게 하는 ‘마음의 습관’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이 마음의 습관을 ‘창조적으로 긴장을 끌어안기’라고 이름 붙이는데요.

119~120.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는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치유의 본질인데, 도처의 모든 상황들이 내 아이에게 집중하는 것을 막고 있는 거예요.

124. 저는 ‘일베’도 그렇고 우리 사회에 자살이 많은 것도 결국 핵심은 주목받고 존중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고, 모두 도구화되고 이용당하고 버려지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공부 못하는 아이는 존중받지 못하고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고요.

124. “귀가 몇 개만 더 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 물이 물에 녹는 / 소리 속에서 / 오래오래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신해욱, <귀>)

131. 미국 대평원의 눈보라는 달리는 자동차들을 좌우로 흔들고 종종 뒤집어놓을 만큼 거세다. 그 지역 농부들은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하면 얼른 뛰어나가 뒷문에서 헛간까지 밧줄을 맨다고 한다. 뒷마당을 헤매다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길을 잃고 자기 집 앞에서 얼어 죽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 서글픈 것은 우리가 헤매다 얼어 죽는 곳이 대평원도 아니고 산꼭대기도 아니고 그저 집 앞일 뿐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 그냥 헛간을 단속하기 위해 마당으로 나간 착실한 농부들처럼 제 집 근처에서, 제 일터 근처에서 엄청난 눈보라를 만났고, 다시 온전한 마음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긴긴 시간을 헤매고 또 헤매고 있다. 그 길지 않은 밧줄을 제때 매어 이 얼어붙은 마음들을 어떻게 무사히 귀가시킬 것인가, 이것이 선생과 우리 모두의 고민이다.

132. 비크너는 소명을 마음 깊은 곳에서의 기쁨과 세상의 절실한 요구가 만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38. 종이 한 장만 쓰면 나올 수 있는 걸, 이십대 삼십대를 내내 감옥에서 보내면서 얼마나 갈등이 많았겠어요. 그래서 어떻게 버텼느냐고 물어봤더니, 사람들은 대단하다, 독하다 그러는데 그게 아니래요. 전향서에 서명을 하면 자기는 살 수가 없었을 거래요. 고등학교 때 같이 도청에 있던 사람들이 다 죽고 자기만 살아남았잖아요. 그래서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는데, 전향서까지 쓰면 자기는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살고 싶어서 안 썼다고 해요. 그분이 고등학교 때 들었던 자기 영혼이 깨어지는 소리가 결국은 생존자 증후군인 거죠. 그래서 거의 마흔살이 되어 [강용주 선생님은] 감옥에서 나와 다시 전남대 의대에 복학해서 가정의학 전문의가 됐어요.

151. 저는 상담에 대해서 공감이라기보다 ‘심리적 참전’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이런 재난의 현장 속으로 들어갈 때는 깊은 공감력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요. 단순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 속에 들어가서 그 사투를 함께 해야 하는 거죠.

169. 190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지진이 발생해 3천명이 죽고 도시가 초토화되었을 때, 현장에 있던 작가 메리 오스틴은 많은 시민들이 집은 잃었지만 가정은 잃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단순히 벽과 가구가 있는 장소 대신 가정이 될 만한 장소와 정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리베카 솔닛은 이렇게 말했다. “재난은 그 자체로는 끔찍하지만 때로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우리가 소망하는 일을 하고, 우리가 형제자매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는 천국의 문 말이다.”

172. 요일마다 몇 시부터 마사지를 한다고만 쓰자고 했어요. … 마사지 종류까지 자세하게 써 붙여놓으면 마사지 숍이나 마찬가지가 되니까 그렇게 쓰면 절대로 안 된다고 했죠. 아주 사소한 일 같지만 그런 차이가 무척 중요합니다. 그런 차이가 이 공간의 콘셉트를 좌우할 수 있거든요.

179. 거창해지면 불편하게 느낄 수 있어요. 흔히 하는 말처럼 ‘내가 자식 잡아먹고 여기서 호강하는구나’ 이런 느낌이 들어버리는 거예요. 한 인간으로서 따스하게 배려받는다는 느낌, 밖에서는 무수히 상처받아도 여기서는 귀히 여겨진다는 느낌이 중요하지, 지나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 수위를 끊임없이 조절해야 해요. 거품이나 군더더기 없이 한 인간으로서의 일상에 주목하게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치유적 환경인 거죠.

183. 어렸을 때 모래더미 위에 막대기를 꽂아놓고 가위바위보를 해서 한움큼씩 떼면서 막대기가 쓰러질 때까지 하는 놀이가 있잖아요. 저는 모든 일에는 그 막대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막대기가 치유의 핵심이고 본질인 거죠. … 막대기를 넘어뜨리지 않는 한에서는 무엇이든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83~184. 저는 모든 인간은 치유적 존재이고, 그것이 치유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치유작업을 하는 동안 제가 하는 일이란 건 결국 그 사람 안에 있는 치유적 요소들, 그 사람이 지닌 온전성, 건강성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스스로 느끼게 해주는 것일 뿐이에요. 그래서 그 과정이 끝나면 ‘선생임, 너무 고맙습니다’가 아니라 ‘내가 참 괜찮은 데가 있나봐’라고 할 수 있어야 온전한 치유인 거예요. 거기까지 나아가면 그 사람은 제가 없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자기 안에 있는 힘을 확인하고 그 힘으로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거죠. 그러지 못하면 의존적인 관계가 됩니다.

188. “번져야 사랑이지”라는 장석남 시인의 시(<수묵 정원 9>)처럼, 치유적 공기는 계속 번져야 하니까요.

196. 남을 비난하게 되는 마음을 무조건 들어주고 수용해주기만 할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설명해주는 것도 중요해요. 그러면 자기가 지나온 세월도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다른 사람도 이해하게 되고요. … 그런 걸 이해하게 되면 자신에 대한 성찰도 깊이 해볼 수 있게 되고, 지금의 상황도 여유를 가지고 수용할 수 있게 되죠. 그것도 말하자면 다른 세상과의 만남이고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는 일인 거예요.

198. 얼마 전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어요. 98세인 할아버지와 89세인 할머니의 이야기인데, 무척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거의 돌아가실 즈음이 되자 어느날 할머니가 시장에 있는 옷가게에 가서 세살짜리 내복 세벌이랑 여섯살짜리 내복 세벌을 사요. 점원이 사이즈를 어떤 걸로 드리느냐고 물으니까 큰 게 좋다고 사시면서. 그걸 보고 손자 손녀들 오래오래 입으라고 사주시나보다 했거든요. 그런데 내복을 사온 할머니가 할아버지 머리밭에서 하시는 말씀이, 할아버지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면 어려서 죽은 여섯 아이들을 찾아서 그 내복을 입혀주라는 거예요. 이 부부가 아이 열둘을 낳아서 여섯을 일찍 잃었는데, 그 아이들에게 내복 하나 못 사 입혔던 것이 그렇게 미안했다면서요. 할머니가 여든아홉이고 열네살 때 결혼을 했으니까 60, 70년 전의 일이잖아요. 그런데도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미안해하는 거예요.

203. 호프트Hooft라는 네덜란드 시인은 사랑했던 연인을 잃은 뒤 비문을 쓰면서 첫줄은 네덜란드어로, 다음은 라틴어로, 그다음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다시 라틴어, 이탈리아어, 마지막으로 다시금 네덜란드어로 썼다고 한다. …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철학자 앙뚜안 베르만은 “자신의 글을 수많은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쳐여만” 모국어로 자기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214. ‘나는 잘 있어요’라고 하는 아이의 말 한마디만 들으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고요. 그래서 시인에게 그 얘기를 전했어요. … 부모의 마음을 흔드는 구절은 따로 있는 거죠. 시적인 표현으로서는 그렇게 훌륭하다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부모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나는 잘 있어요’ 하는 그런 한마디인 거에요.

219.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의 무게랄까. 어느 때가 되면 견딜 만해져. 그 아래서 빠져나올 수 있는 무언가로 바뀌어. 그리고 지니고 다닐 만해 - 주머니 속 벽돌처럼. 그리고 가끔이지만 까먹을 때도 있고, 그런데 그러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 안에 손을 넣게 돼. 그럼 거기 있어.”

229. ‘헤어진 여동생’은 비유하자면 ‘놓치고 살았던 자기 본모습 또는 자기 원형’이라 할 수 있어요. 원형적 자기를 만나는 순간 인간은 자기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되거든요.

239~240. “하느님,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라인홀드 니버, <평온을 구하는 기도문>)

249~250. 치유는 아주 소박한 것입니다. 사람 마음을 어떤 순간에 살짝 만지는 것, 별것 아닌 데 사람이 휘청하는 것, 그냥 울컥하는 것, 기우뚱하는 어떤 순간, 그것이 바로 치유의 순간입니다.

261. “혼란이 지배할 때 … 작가는 자기를 위해 존재하다고 평론가는 생각하기 시작한다”(니노 니꼴로프, <혼란>)

279~281.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를 하면서 계속 혼자 생각하고 있던 것이 ‘적정심리학’이에요. ‘적정기술’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첨단과학기술이 아니라 그 사회의 환경과 조건에 맞는 적정한 수준의 기술이라는 거예요. (중략) 대단한 이론이 아니라 몇 가지 근본적인 것만 가지고도 실제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걸 보니까 놀라운 거죠. 그것이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입니다. 복잡한 기술이나 기법이 아니라 이런 적정심리학을 구현하는 것 말이죠. 그래서 나중에는 그런 적정심리학의 근본적인 것들을 잘 정리해보고 싶어요.

290. 어느 날 지나가다 한 운전사의 차를 얻어 탔답니다. 호퍼가 목적지가 뚜렷하지 않다고 말하니까 이 운전사가 ‘희망이 없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하다’라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면서 훈계를 했어요. 그런데 이 떠돌이 노동자가 듣기에 괴테가 진짜 그렇게 말했다면 별로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자기는 별 볼일 없는 노동자였지만 살아보니까 희망을 도무지 말하기 어려운 순간이 있더라는 거죠. 그래서 다음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도서관에 갔어요. 괴테의 책을 찾아보니 운전사가 잘못 인용한 것이었대요. 괴테는 ‘희망Hoffnung이 없으면’이라고 한것이 아니라 ‘용기Mut가 없으면’이라고 말했던 거죠.

: 1:54 am: bluemosesErudition

“성 바깥의 싸움이란 무엇인가? 여러 영역 중 핵심은 바로 평범한 민심을 바꾸는 일입니다. 정치가 어떤 퇴행적 결정을 했다 해도 그것은 정치만의 판단이 아니라 민심의 흐름을 의식한 결정일 것입니다.”(송인수, 윤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