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밍에 관한 오해. “레밍이 집단으로 절벽에서 뛰어내린다는 오해는 과거 미국의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만들어낸 게 널리 퍼진 것이라고 해요. 그렇게 대규모로 자살하는 동물은 없어요.”
레밍에 관한 오해. “레밍이 집단으로 절벽에서 뛰어내린다는 오해는 과거 미국의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만들어낸 게 널리 퍼진 것이라고 해요. 그렇게 대규모로 자살하는 동물은 없어요.”
‘관종’이라는 유행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이른바 ‘관심종자’의 준말로, 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중략) 정신의학자 융의 표현을 빌리자면 디지털 활동으로 인한 자아 팽창(ego-inflation)이 현실에서 한번 더 부풀려지는 것이다. 문제는 관심을 끄는 방법이다.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하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더 쉽고 파괴력 있는 수단을 선택한다. 그래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장난을 치기도 한다. 왜곡된 디지털 활동을 통해 자기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허풍을 떠는 모습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디지털과 현실이 별개일 수 없다. 자기의 역할을 묵묵히 완수해야 아름다운 것이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것은 관심을 끌고 싶어하지 않는다.”
쓰는 이도 읽는 이도 자신이 ‘아는 것’ 속에 시를 가둬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 그게 사건이든 풍경이든 아니면 삶 자체든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붙들려 우리는 시를 쓰고 또 읽는 것 아닌가. 그러니 시의 매혹에 대해서라면 의미로 치환되는 명징한 논거보다는 ‘그저 드러날 뿐이며 그로써 신비를 갖는다’(비트겐슈타인)는 말이 좀더 유효할 것이다. 어떤 순간의 감정이나 예감이 끝내 말해질 수 없는 채로 드러나는 것.
대개 각각의 층위들이 논리적으로 튼튼하게 연결된 시들일수록 시인의 의도가 깊게 관여하여 언어적 질감을 해치곤 한다. 아무런 필연성도 찾을 수 없다면 당연히 좋은 시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어떤 필연성도 찾을 수 없지만 각각의 층위가 알 수 없는 연관 속에 배치되고 있다고 느껴지는 시가 있다. 경험의 실감보다는 감각적 배치를 통해 세계를 구축하는 것.
여전히 내가 아는 곳에 세계가 있다고 믿으며 단일하게 그것을 포착하려는 시선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_ 신용목의 글을 읽으며, “초점 없는 혼합주의”가 떠올랐다.
“김범수 카카오 의장, 김정주 NXC 회장,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이재웅 다음 창업자,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등 ‘한국 벤처 1세대’ 5인방이 의기투합해 2014년 국내 최초로 ‘벤처 자선(venture philanthropy)회사’라는 개념을 선보이며 만든 회사가 C프로그램이다. 그 5인방이 선택한 인물, C프로그램의 엄윤미(42) 대표”
Pernando Pessoa, 1888. 6. ~ 1935. 11.
해상 송시(Ode Marítima)를 읽고 의문. 왜 페소아의 이명은 허명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