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유 : 예수님의 명령, 기독교의 생존 방식
2. 초점 : 그리스도 닮기, 그리스도 닮게 하기
“활동으로 생산을 대신할 수 없고, 생산으로 재생산을 대신할 수 없다”(도슨 트로트맨)
1. 이유 : 예수님의 명령, 기독교의 생존 방식
2. 초점 : 그리스도 닮기, 그리스도 닮게 하기
“활동으로 생산을 대신할 수 없고, 생산으로 재생산을 대신할 수 없다”(도슨 트로트맨)
26. 화가 에드워드 호퍼는 여행 중에 사람이 느끼는 쓸쓸함과 고독의 정서를 화폭에 담아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 1938년에 완성한 <Compartment C Car>라는 작품에는 기차 안에서 책을 읽으며 홀로 여행하는 여인의 모습을 담았다. 혼자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여인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수많은 이야기를 내면에 숨겨놓은 것만 같다.
32.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에 실린 판화 일러스트로 처음 그녀의 존재를 알았다. 오하시 아유미는 1960년대부터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고 생활 에세이를 수십 권 펴낸 작가이자 계간지 <아르네Arne>의 편집인, 그리고 도쿄와 교토에 거점을 둔 ‘이오 숍’과 ‘이오 플러스’의 디자이너 겸 주인이다.
34. “아아, 그렇죠. 저희 가게 간판이 잘 안 보이지요. 제대로 된 간판을 달아야지, 달아야지 하면서 여태 2년째 못 달았네요.” (중략) 내가 한국에서 온 외국인이고 오하시 아유미의 오랜 팬으로 <아르네> 전권 모았으며 이곳을 일부러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가게 매니저는 경계심이 풀어졌나 보다. 내가 고른 물건의 값을 계산하면서 조금 뜸을 들이더니 이내 신중한 표정으로 숨겨둔 진실을 알려주었다. “실은… 저희는 일부러 눈에 잘 보이는 간판을 달지 않았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찾기 어렵도록요. 숨은 집처럼,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가게로 만들고 싶었어요. 저희는 사전에 알고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 편안하게 둘러보시는 것을 최우선으로 신경쓰거든요. 지나다 불쑥 들른 분들이 너무 많아지다 보면 마음먹고 여기로 걸음하신 손님들이 가게를 둘러보실 때 긴장하게 되니까요.”
47. 교토의 노포에선 무조건 손님을 ‘왕’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파는 쪽과 사는 쪽을 대등하게 여긴다는 건 그만큼 자기가 만들고 파는 제품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령 노포의 현관문을 열거나 노렌(천 장막)을 걷고 들어갈 때 먼저 말을 거는 쪽은 가게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다. “실례합니다.” “안녕하세요.”
52~53. ‘교토의 부엌’이라 불리는 니시키 시장錦市場에는 1560년에 창업한 칼 전문점 ‘아리쓰구’가 있다. 요리용 각종 칼을 비롯, 냄비, 도마 등의 도구들도 판다. 교토의 부모 세대는 자식 세대에게 음식 맛을 전수하면서 아리쓰구의 요리 도구들도 대물림한다. ‘도구라는 것은 소중히 다루면 언제까지라도 생명을 가진다’고 강조하며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건을 대하는 올바른 마음을 전하는 아리쓰구. ‘수리할 수 있는 물건만을 만드는 것이 장인’이라며 수십 년 전에 만든 상품이라도 완벽하게 수리해내는 솜씨를 발휘한다. “새것이 좋다거나 오래된 것이 좋다거나 그런 건 없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겁니다. 그리고 좋은 것은 항상 더 좋아질 여지가 있습니다.” 아리쓰구의 주인이자 칼 장인은 잡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하지 않은 좋은 점들은 그대로 유지하되 항상 어딘가 조금씩 더 나아지려고 애쓰는 자세. 이것이 교토의 노포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태도일 것이다.
70~72. 1982년에 문을 연 서점 게이분샤 이치조지점의 시작은 30평 정도의 작은 책방이었다. 당시에는 따로 점장도 없이 아르바이트 점원들(주로 대학생이나 예술계 프리랜서들이었다)이 각자 특기나 관심 분야(영미 문학이나 만화, 음악, 디자인 등)를 살려서 서가를 하나씩 채워나갔다. 매출보다 흥미로운 서가를 만드는 일을 더 중시해서 점원들이 확신을 가지고 자신이 좋아하는 책들을 팔게 한 것이다. 점원들의 개성적인 큐레이션을 통해 다양한 가치들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면서 서점의 고유한 색깔을 만들어나갔다. (중략) 서점 홈페이지의 ‘찾아오는 길’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저희 서점을 찾아오다가 만약 길을 헤매시면, 인근 주민들에게 길을 물어보시는 것은 민폐가 되오니 아무쪼록 삼가주십시오. 반드시 서점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서 길을 물어봐주시길 바랍니다.”
95~97. 교토에는 경관조례법이 있어 지나치게 화려한 간판 색깔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브랜드 이름의 글자 색상은 흰색, 검정색, 갈색 외에는 접수가 되지 않고 특히 선정적인 느낌의 빨간색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또한 교토의 특정 거리는 건물 높이도 20미터까지로 제한되어 있다. 아무리 높아도 대략 5층 건물을 넘어설 수는 없다. 기온祇園, 가미시치겐上七軒 등의 유명 화류가에는 전봇대나 전선이 보이지 않는다.
140~141. 교토 시내 한가운데 거리에 위치한 다와라야 료칸의 객실은 고작 열여덟 개다. 하지만 객실 하나하나에 일본 고유의 문화가 고도로 농축되어 있다. 자연과 빛, 예술, 온화함과 정숙함이 어우러져 있고 객실에서는 유리 창문을 통해 청초한 일본 정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다와라야 료칸에 투숙해본 경험에 대해 에세이스트 사카이 준코는 에세이 『도쿄와 교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다와라야 료칸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는 순간 매우 독특하고 밀도 높은 공기에 휩싸인다. 외부 세계와는 다른 규칙으로 움직이는 장소. 어딘지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은 붕 뜬 느낌. 오늘도 내일도 이곳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지가 않다. 마치 작은 우주에 혼자 떠 있는 고독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때의 고독은 차라리 해방감에 가깝다.” 분명 나머지 열일곱 개의 객실도 손님들로 꽉 차 있을 텐데 그들의 모습은커녕 작은 소음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일을 하러 들락날락하는 종업원의 인기척조차 느낄 수가 없다. 이 고요함은 실은 다와라야 료칸 측의 엄청난 노력이 바탕이 되어 있다. 객실 배치나 복도의 동선, 가구 배치나 조명 상태 등, 양질의 고독감은 가장 섬세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상태로 세심하게 계산되어 연출된다.
173. 교토 사람들은 ‘교토’라는 단어 자체에 자랑할 만한 브랜드 가치가 있음을 내심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교토’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가게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가게 간판이나 노렌에 교토를 상징하는 ‘京’이 새겨져 있다면 그것은 자기 본연의 실력 대신 ‘교토’라는 상징적인 브랜드에 의지하는 ‘가짜’로 간주한다. ‘교토 요리’라고 간판에 굳이 써 붙이는 식당도 그 행위 자체로 이미 ‘요리 솜씨에 자신 없음’을 드러낸다고 본다.
229~230. 예를 갖추어 장황하게 인사를 마치고 나니 어쩐지 괜히 수줍어져서 우리는 택시를 잡을 수 있는 대로변으로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분주히 옮기기 시작했다. 한참을 앞만 보고 걷는데 누가 우리를 부르는 것만 같은 기운이 등 뒤로 느껴졌다. 몸을 휙 돌려 보니 치요 아주머니가 료칸으로 다시 들어가지도 않고, 아까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때와 똑같은 자세로 서서 우리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황송하다는 듯이 연거푸 머리 숙여 우리를 향해 절을 했다. 우리는 놀랍고 반가우면서 한편으로는 우리가 뭐라도 된 양 계면쩍기도 하여, 절 대신 서양식으로 캐주얼하게 손을 흔들었다. 멀리서 우리가 그러는 걸 본 치요 아주머니는 이번에는 앳된 소녀처럼 활짝 웃으며 팔을 번쩍 들어 함께 손을 흔들었다. 몸을 다시 앞으로 돌려 걸었다. 이제 조금만 더 걸으면 곧 큰길이 나올 터였다. 마침내 골목길 모퉁이를 끼고 왼쪽으로 꺾어 큰길로 빠지려던 찰나, 에이 설마 하며 한 번 더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랬더니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치요 아주머니가 이번에는 우리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상체를 90도로 완전히 숙인 상태로 이쪽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혹시 아까부터 저러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내심 죄송했다. 자신이 접대한 손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인사를 하고 또 한다는 ‘교토 오모테나시(お持て成し)’ 이야기는 진짜였다.
_ 임경선,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예담, 2017.
성장기 시절 요코하마와 오사카, 그리고 도쿄에서 6년을 살았습니다. 가장 위에 있는 홋카이도부터 가장 아래에 있는 규슈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꽤 많은 크고 작은 도시와 시골 마을로 두루 여행도 다녔지요. 그 중 가장 좋아하는 곳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도쿄와 교토를 꼽겠습니다. 도쿄에 관해서는 지난 2016년 봄에 『임경선의 도쿄』라는 독립출판물(2,000부 한정판이었습니다)을 만들어 지극히 개인적으로 편애하는 도쿄의 곳곳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어서 이듬해 교토 편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문득 교토라는 도시는 도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한두 번 교토에 갔을 때는 저도 그저 다른 관광객들처럼 명소를 돌아다니기 바빴습니다. 천 년간 일본의 수도였던 곳이다 보니 봐도 봐도 끝이 없었지요. 그러다가 지난 연초, 세 번째 교토 여행에서는 명소가 아닌 일상의 장소들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의아했던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죠. 특히나 개인들이 운영하는 교토의 가게들이 그랬는데, 가령 왜 어떤 가게들은 일부러 드러나지 않게 골목에 꼭꼭 숨어 있을까. 왜 서점 홈페이지의 ‘찾아오시는 길’ 안내문에서는 동네 사람들에게 길을 묻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일까. 무슨 배짱으로 저 밥집 주인은 저토록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것인가. 왜 라이벌 가게의 홍보를 자기 가게에서 굳이 해주는 것일까. 이 카페는 일주일에 나흘만 열어도 괜찮은 것인가.
어딘가 달라도 한참 달랐습니다. 그것은 제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고 그때부터 저의 ‘교토 덕질’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토에 대해 보다 깊이 알고 싶어서 그에 관한 다양한 문헌들을 찾아 읽어나갔습니다. 교토의 역사와 토양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습성, 일관되게 지켜온 가치관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 결코 변치 않을 어떤 의지와 마음가짐들 그리고 이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교토 고유의 정서들이 제게는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토와 교토 사람들은 자부심이 드높았지만 동시에 겸손했고, 개인주의자이되 공동체의 조화를 존중했습니다. 물건을 소중히 다루지만 물질적인 것에 휘둘리기를 거부했고, 일견 차분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단호하고 강인했습니다. 예민하고 섬세한 깍쟁이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색깔을 지켜나갔고,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타인을 향한 예의를 중시했습니다. 성실하게 노력하지만 결코 무리하지는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스스로 만들어갔고, 끝없는 욕망보다는 절제하는 자기 만족을, 겉치레보다는 본질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제가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인간상에 가깝습니다.
도쿄가 ‘감각’의 도시라면 교토는 ‘정서’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토에 대해서라면, 이 도시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일관되게 품어온 매혹적인 정서들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옛것과 오늘의 것이 어우러져 공존하는 이곳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저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교토의 한 계절을 걸었고 그 시간 속에서 교토 고유의 정서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제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생각의 중심을 놓칠 때, 내가 나답지 않다고 느낄 때,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마음을 비워낼 필요가 있을 때, 왠지 이곳 교토가 무척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_ 임경선, “교토의 정서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예담, 2017, 5~9쪽.
임경선은 “만난 지 삼 주 만에 청혼을 받았다. 이른바 ‘육식남’을 만나 서른을 눈앞에 두고 결혼했다. 그해 갑상선암이 세 번째 재발해 수술을 받았고, 어느새 노산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처음 시도한 인공수정으로 쌍둥이를 가졌지만 두 아이 모두 잃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 서른일곱의 나이에 윤서를 낳았다.”
“사해 남서부의 늪지에서 채취된 소금은 불순물을 포함하고 있어서 소금이 녹아 빠져 나가면 맛을 잃은 쓸모없는 결정체만 남게 된다.”
“내가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어딘가에 다다르거나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진화하는 방법, 더 나은 자신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 여정에는 끝이 없다.”
“아주 기분 좋은 봄날의 하루였다. 그 무렵 진구 구장의 외야에는 벤치 시트가 없이, 경사면에 그저 잔디가 깔려있을 뿐이었다. 그 잔디 위에 누워서, 차가운 맥주를 홀짝거리며, 때때로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느긋하게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관객은 - 늘 그렇듯이 - 많지는 않았다. 야쿠르트는 시즌 개막 경기의 상대로 히로시마 카프를 홈 구장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야쿠르트의 투수는 야스다로 기억하고 있다. 작은 몸집의 땅딸막한 투수로, 아주 치기 힘든 변화구를 던진다. 야스다는 1회초 히로시마 타선을 무실점으로 간단히 막아냈다. 그리고 1회말 선두 타자인 데이브 힐튼(미국에서 막 건너온 새 얼굴의 젊은 외야수였다)이 좌측 방향으로 안타를 쳤다. 배트가 강속구를 정확히 맞추어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구장에 울려 퍼졌다. 힐튼은 재빠르게 1루 베이스를 돌아서 여유 있게 2루를 밟았다. 내가 ‘그렇지. 소설을 써보자’라는 생각을 떠 올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다.”
쨍하다. 햇볕 따위가 내리쬐는 정도가 강하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높고 강하게 울리는 소리가 나다.
Q. 글로벌 순위가 밀리고 있다.
A. “답은 명확하다. 연구력이다. 외국기관의 평가는 논문 인용 횟수를 중시한다. 1위 논문은 5년간 평균 누적이 6000번, 2위는 3000번, 3위는 2000번이다. 1위 논문이 3000명분의 몫을 한다. 고려대와 성균관대는 1위 논문을 관리하려 교수를 끌어모은다. 우리는 이제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