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환희를 느낀 프로젝트는 아는 후배를 위해 만든 청첩장이었다. 전에도 청첩장을 만들어 선물한 일이 종종 있었지만 어느 순간 어떤 그림을 넣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이디어에도 한계를 느꼈다. 그러다가 시를 선물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중 하나를 영어와 한글로 표지와 모시는 글 자리에 넣었다. 주례하시는 분이 주례사에 앞서 이 시를 읽어주셨다. 아마도 신랑이 썼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소중한 언약을 하는 좋은 자리에서, 좋은 사람들에게, 내가 선물한 시가 청첩장의 형태로 전달되고 그것이 주례사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좋은 선물 하나 했구나’라고 생각했다. … 이러한 작업들 하나하나가 자기 자리에서 빛을 낸다면 억지로 알리지 않아도 나중에 큰 물결로 되돌아온다고 생각한다.
포트폴리오가 쌓여서 어떤 가능성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여기저기 신청해 보기도 했는데 이것 자체로도 좋은 경험이 된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일을 해보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2001년에 월간 <디자인>을 위해 스테판 자그마이스터 스튜디오를 방문해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공모전에 참가하는 작업이 복잡하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 귀찮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이것이 디저트를 먹는 것처럼 신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때 스페판 자그마이스터는 뉴욕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피곤하고 지쳐서가 아니라 삶을 즐기기 위해 쉬는 것이고, 뉴욕에서 벌어지는 매일 매일의 경험이 너무나 즐겁기 때문에 새벽 여섯 시면 잠이 깬다고 말할 만큼 에너지가 넘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공모전에 출품하는 작업이 그저 즐거울 뿐이라고 하더라. 인터뷰를 마치며 잡지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했더니 ‘어떤 포맷을 원하느냐? 35미리 슬라이드 필름? 중형이나 대형 슬라이드?’ 이런 식이었다. 그는 즐겁게 일하고 일이 끝나면 기록과 정리를 놀랄 만큼 치밀하게, 그리고 즐겁게 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픽 디자인이 ‘아주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직업이라 생각한다. 할머니가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면 새록새록 잠들고 하는 것처럼. ‘아주 훌륭한 이야기’이거나 ‘훌륭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범주에 있는 것’이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 혹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유머 감각이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 이것을 관조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정신적인 여유가 있어야 나오기도 하고 노력해서 찾아내기도 한다. 전시하면서 ‘아, 사회를 관조하고 끌어안아야겠구나’ 하고 느꼈다. 치열하게 살아야겠지만 그 안에서 즐길 줄 아는 자세, 디자이너라면 꼭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삶이 힘들 때 어떤 디자인을 보면 미소가 지어지면서 ‘재밌다’,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좋겠다. 디자이너의 영혼이란 바로 이런 관조하는 자세, 감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