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97년 체제’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신자유주의적 제도의 일반화’라기 보다는 ‘네트워크 위계의 완성’이 그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본다. 자유주의적 제도가 깔린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경쟁에 맞서기 위해 더 강고한 위계 구조를 구축한 것이 97년 체제의 특징인 것이다.
92. 1997~1998년 금융 위기는 기업 내에서 이들의 권력을 극적으로 강화했다.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386세대가 유교적 관료제와 결합한 권위주의에 ‘반체제 운동’으로 저항하며 ‘재야’에서부터 대항권력을 구축한 반면, 기업의 386세대는 1997년 금융 위기로 인해 ‘저절로’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먼저, 1997년 금융 위기의 폭탄은 산업화 세대의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당시 이들(1930년대 후반 ~ 1940년대 후반 출생 세대)은 추풍낙엽처럼 노동시장에서 퇴출했다. 대기업들은 금융 위기를 적체된 인력을 구조 조정하는 기회로 삼았고, 이 세대는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 없이 ‘구조 조정’의 칼날에 몸을 맡겨야 했다. 반면, 30대로 기업 조직의 밑바닥부터 중간 허리를 구성하고 있던 386세대는 이 칼날을 무시 비켜나며 대부분 생존했다. 그런데 이들이 의도하지 않은,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그다음 세대의 ‘전멸’로부터 비롯됐다. 1997년 금융 위기에 닥쳐 기업들은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정규직’ 사원을 채용하지 않는다. 채용하더라도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장기 호황에 입사한 386세대에 비해 훨씬 작은 규모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화된 채 입사한다. 386세대는 졸지에 아래위가 모두 잘려나가면서 기업 조직에 사실상 홀로 남겨진 ‘거대한 세대의 네트워크 블록’이 되어버린 것이다.
107~108. 한 세대가 권력을 독점하면, 그만큼 밀려난 세대가 있기 마련이다. 정치권과 마찬가지로, 희생된 세대는 바로 아랫세대인 40대다. 1960~1964년 출생 세대가 30대 중ㆍ후반(1990년대 후반)에 최초로 임원에 진입(2퍼센트)해 40대 중ㆍ후반(2000년대 후반)에 25퍼센트에 이르며 확실한 주류로 자리매김했고, 1965~1969년 출생 세대가 1퍼센트(2000년대 초반)에서 20퍼센트(2010년대 초반)로 그 뒤를 따랐다. 반면 1970~1974년 출생 세대는 2000년대 후반 0.3퍼센트로 진입해, 10년 후 오늘날 386세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9.4퍼센트를 기록 중이다(성장의 기울기를 비교해보라). 50대가 임원직을 틀어쥐고 놓지 않으니, 40대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적체되어 있는 것이다. 이 데이터의 결과와 1장의 정치권 데이터를 합산하면, 386세대는 근 20년에 걸쳐 한국의 국가와 시장의 수뇌부를 완벽하게 장악했고, 아랫세대의 성장을 억압하며 정치권과 노동시장에서 최고위직을 장기 독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_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