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September 19th, 2019

September 19, 2019: 8:25 pm: bluemosesErudition

91. ‘97년 체제’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신자유주의적 제도의 일반화’라기 보다는 ‘네트워크 위계의 완성’이 그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본다. 자유주의적 제도가 깔린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경쟁에 맞서기 위해 더 강고한 위계 구조를 구축한 것이 97년 체제의 특징인 것이다.

92. 1997~1998년 금융 위기는 기업 내에서 이들의 권력을 극적으로 강화했다.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386세대가 유교적 관료제와 결합한 권위주의에 ‘반체제 운동’으로 저항하며 ‘재야’에서부터 대항권력을 구축한 반면, 기업의 386세대는 1997년 금융 위기로 인해 ‘저절로’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먼저, 1997년 금융 위기의 폭탄은 산업화 세대의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당시 이들(1930년대 후반 ~ 1940년대 후반 출생 세대)은 추풍낙엽처럼 노동시장에서 퇴출했다. 대기업들은 금융 위기를 적체된 인력을 구조 조정하는 기회로 삼았고, 이 세대는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 없이 ‘구조 조정’의 칼날에 몸을 맡겨야 했다. 반면, 30대로 기업 조직의 밑바닥부터 중간 허리를 구성하고 있던 386세대는 이 칼날을 무시 비켜나며 대부분 생존했다. 그런데 이들이 의도하지 않은,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그다음 세대의 ‘전멸’로부터 비롯됐다. 1997년 금융 위기에 닥쳐 기업들은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정규직’ 사원을 채용하지 않는다. 채용하더라도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장기 호황에 입사한 386세대에 비해 훨씬 작은 규모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화된 채 입사한다. 386세대는 졸지에 아래위가 모두 잘려나가면서 기업 조직에 사실상 홀로 남겨진 ‘거대한 세대의 네트워크 블록’이 되어버린 것이다.

107~108. 한 세대가 권력을 독점하면, 그만큼 밀려난 세대가 있기 마련이다. 정치권과 마찬가지로, 희생된 세대는 바로 아랫세대인 40대다. 1960~1964년 출생 세대가 30대 중ㆍ후반(1990년대 후반)에 최초로 임원에 진입(2퍼센트)해 40대 중ㆍ후반(2000년대 후반)에 25퍼센트에 이르며 확실한 주류로 자리매김했고, 1965~1969년 출생 세대가 1퍼센트(2000년대 초반)에서 20퍼센트(2010년대 초반)로 그 뒤를 따랐다. 반면 1970~1974년 출생 세대는 2000년대 후반 0.3퍼센트로 진입해, 10년 후 오늘날 386세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9.4퍼센트를 기록 중이다(성장의 기울기를 비교해보라). 50대가 임원직을 틀어쥐고 놓지 않으니, 40대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적체되어 있는 것이다. 이 데이터의 결과와 1장의 정치권 데이터를 합산하면, 386세대는 근 20년에 걸쳐 한국의 국가와 시장의 수뇌부를 완벽하게 장악했고, 아랫세대의 성장을 억압하며 정치권과 노동시장에서 최고위직을 장기 독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_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

: 6:41 pm: bluemosesErudition

1. 이 논문은 선거민주주의의 형식이 유지되고 있으되 선거가 실제로 민주적 대표와 경쟁의 제도로 기능할 수 있게끔 하는 제반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 혼합 정치체제의 문제틀에 기초하여, 멀리는 1987년 민주화 개시 이후 한국 정치의 한계, 가까이는 이명박ㆍ박근혜 정권 9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을 분석한다. 특히 선거체제가 입헌ㆍ법치주의에 얼마나 착근되었는지를 주목하는 ‘착근된 민주주의’(embedded democracy)와 ‘결손 민주주의’(defective democracy)의 이론에 의거하여, 한국 민주주의가 87년 이후 전토적인 위임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가운데 점차 비자유 민주주의, 배제적 민주주의, 나아가 후원 민주주의의 문제까지 포함하는 총체적 결손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5. 문제는 선거가 현대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필수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선거제도 자체를 부정하거나 명백히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오용하거나 여론을 조작할 수 있으며, 또는 선거를 통해 획득한 권력으로 시민들의 기본권과 법치질서, 민주주의 제도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명백한 독재가 감소해온 바로 그 역사적 과정에서 여러 유보조건이 붙는 “형용사가 붙은 민주주의(democracy with adjectives)”가 증가해왔다(Collier & Levitsky, 1997).

8~9. 1990년대 이후 국내적 상황이나 국제적 환경에 의해 명백한 독재로의 회귀가 어려워진 조건 하에서 선거경쟁이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기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결손 또는 부재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기제로 기능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9. 말하자면 ‘민주주의에 대한 입헌주의적 견제’, 즉 민주주의가 선거 승리에 의해 정당화된 권력 남용으로, 혹은 다수자의 지지나 묵인으로 인한 민주주의의 파괴로 이르게 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이론과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체계적으로 반영한 것이 ‘착근된 민주주의(embedded democracy)’의 이론이다. 독일의 정치학자인 메르켈(Wolfgang Merkel)과 그의 동료들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제도적 부분 체제를 구분한다. ①선거체제, ②정치적 기본권, ③시민적 자유(국가권력 남용 방지), ④수평적 책임성(권력분립), ⑤선출된 대표자의 실질적 권력이 그것이다. 이 5각형의 개념체계는 사실상은 1+4의 형태다. 그 중심에 선거 체제가 있다. 선거 체제는 민주주의 나머지 네 가지 하위 체제에 착근될 때에 비로소 민주적 기능을 할 수 있다.

9~10. 입헌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해 선출된 권력의 무제한적 권력을 허용하며(민주적 전제주의), 반대로 민주주의 없는 입헌주의는 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한 헌법 체계의 과대 권력을 허용한다(권위주의적 법치주의). 착근된 민주주의는 전자의 위험에 초점을 두고 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붕괴와 나치 체제의 등장을 경험한 독일 현대사로부터 얻은 교훈을 반영하고 있다.

11~12. 선거 체제에 상당한 결손이 있다면 권위주의 체제에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거 체제에 명백한 훼손이 없다 할지라도 다른 네 가지 하위 체제의 결손은 선거가 민주적 기능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착근된 민주주의 이론은 이 같은 현상을 ‘결손 민주주의(defective democracy)’로 개념화하고, 민주주의의 각 하위 체제에 상응하여 결손의 네 가지 유형을 체계화했다. ①정치적 기본권이 심각하게 제한될 경우는 ‘배제적 민주주의(exclusive democracy)’, ②시민적 자유가 국가권력 남용에 의해 빈번히 침해될 경우에는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 ③권력분리의 결여, 즉 행정부 권력을 의회와 사법부가 견제하지 못할 경우에는 ‘위임 민주주의(delgegative democracy)’, 끝으로 ④선출된 대표자가 실질적인 권력을 갖지 못하고 군부, 군벌, 경제권력, 기타 배후세력이 실권을 갖고 있는 경우는 ‘후견 민주주의(tutelary democracy)’로 개념화된다.

_ 신진욱, “한국에서 결손 민주주의의 심화와 촛불의 시민정치”, 시민과세계, 29호(2016. 12.)